미국 남성에게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인 양공주는 아마 한국전쟁 기간 동안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왔을터이지만 이 인물은 ‘위안부‘라는 형태로 이미 그곳에 존재했다. 양공주의 시작은 불확실하고 그 발달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모호하다. 하지만 기지촌 매춘에 관한 최근의 문헌들과 위안부여성 및 기지촌 초기 세대 여성들의 서사 모두가 이 두 시스템 또는 두 몸을 깔끔하게 가르는 경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커밍스에 따르면 미군이 1945년 9월에 한국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일본이 한국에 만든 위안소 역시 점령하여 그곳에 배치된 여성들도 함께 넘겨받았다. 이와 유사하게요시미 요시아키吉見明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군의 폭력‘에 관한 뜬소문이 맹위를 떨쳤고 점령군을위한 ‘완벽한 위안소 시설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라는 요구역시 그랬다"고 한다. "요컨대 사람들은 일부 여성의 몸을 제공함으로써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 P171

존 라이John Lie는 20세기 한국에서 성노동이 발전해온 궤적을 추적하면서 전근대/식민지 이전 시기에 엘리트 지주계급을 위해 한정된 여성 계층이 수행하던 성노동이 식민지시기와 식민지 이후 시기에 상업화되고 군사화된 성노동으로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를 분석한다. 일본의 한국 식민화는 이나라에 근대화를 가져오고, 따라서 성노동의 계층 시스템을 제거했지만 두 가지 새로운 형태의 매춘을 등장시켰다.
사업가와 정부 관료들을 위한 상업화된 성노동과 일본군을위해 마련된 ‘위안소‘에서 수행되는 성노동이 그것이다. 라이는기지촌은 일본 위안소의 연장선이라는 입장을 보강하면서이렇게 말한다. "동북아 지정학에서 미국의 지배는 남한 국내의 성 경제에서 미군(1945년에는 사실상 모든 남성)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 미국의 지배하에서 주요 성노동 조직은 주한 미군을 위해 일했다. 식민지 시기에 한국 여성들은 일본식민지 지배자들을 위해 일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군에게 유흥을 제공했다." 미 군정은 1946년에 공식적으로 매춘을 금지했지만 1953년까지 한국에는 35만 명의 매춘부가 있었고 이들 가운데 60퍼센트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군 기지를중심으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캐서린 문에 따르면 "일본군 성노예들은 한국 내 미군 대상 매춘의 역사적 원형으로 기능한다." - P185

여성의 성노동을 국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한국에서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외국인을 위한 매춘은 1970년대초에 들어서야 한국 정부로부터 적법성을 얻었고, 정희 세라 서에 따르면 이제는 "이 나라의 연간 예산보다 더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황영주는 "한국의 경제적 번영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현재의 매춘 시스템"은 "국가 폭력의한 양상으로서 매춘, 가부장제, 군사주의가 결탁한 뿌리 깊은 결합 관계"에서 비롯된 "더 큰 실천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여성과 국가에 관한 전통적인 서사를 살피면서 "여성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만 그 기여를 인정받아 왔다. (...) 일상적인 시기에 여성은 종종 망각, 배제 또는 주변화되었지만 국가적인 위기나 전쟁 기간에는 여성의지위가 국가에 의해 ‘승격‘되는 경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에 기지촌 성노동자들을 ‘민간 외교관‘이라 부른 사례는 국가가 압박을 받고 있을 때 전형적으로 주변화되어있던 여성들이 어떻게 ‘승격된‘ 지위를 획득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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