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매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가에 웃을 때 생기는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늘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싶었다. 뭔가에 쫓기듯 경계심 그득한 표정이 사라지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주절주절 떠들었다. 농담도 했다.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가기 전의 찰나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 P154
그는 눈을 감더니 편안히 고개를 젖혔다. 면도날로 그의 피부를 부드럽게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용한 침묵을 깨는 건 오로지세면대 물에 내가 면도날을 헹굴 때마다 참방이는 물소리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수염을 깎으면서 윌 트레이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깊이 팬, 때 이른 주름들. 옆얼굴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다 의미심장한 꿰맨 흉터를 보았다. 사고때 생긴 게 틀림없었다. 잠 못 이룬 숱한 밤을 말해주는 자줏빛 그늘. 소리 없는 통증을 증언하는 미간의 주름. 그의 맨살에서는 따뜻하고 달콤한 어떤 냄새가 솔솔 풍겼다. 셰이빙 폼의 향, 그리고 오로지 월에게서만 나는 독특한 향, 그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체취가 풍겨왔다. 월의 얼굴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는 엘리샤같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쯤은 얼마나 쉬웠을지 이해하게 되었다. 잠시나마 그가 평화로워 보인다는 사실에 힘을 얻어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을 놀렸다. 월에게 사람의 손길이 닿을 때라고는 무슨 의학적 처치나 치료를 할 때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가볍게 손가락이 그 살갗에 머물게 두었다. 네이선이나 의사가 그를 다룰때처럼 비인간적이고 사무적인 손짓이라면 정말 하기 싫었다. 이상하리만큼 친밀한 감각이었다. 월을 면도해 주는 일은. 차츰 나는 깨달았다. 휠체어가 장애물이 될 거라고, 장애 때문에 어떤 종류의 육감적인 관계도 스며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내가 지레짐작하고 있었다는 걸.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지가 않았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바싹 붙어서, 손길이 닿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는 살갗을 느끼면서, 그가 뱉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얼굴과 얼굴이 기껏몇 센티미터 떨어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살짝이나마 평정심을 잃지않기란 불가능했다. 반대편 귀까지 수염을 다 깎았을 무렵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표지를 넘어서 버린 듯 기분이 어색해졌다. 어쩌면 월도 피부에 닿는 내 손길의 압력이 미묘하게 달라진 걸느꼈으리라. 어쩌면 그냥 그가 남달리 주변 사람들의 기분에 민감한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어느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P154
종교 때문이 아니다. 엄마가 되어보지 않으면 누구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내 눈앞의 이사람은 이 잘나빠진 수염도 안 깎고 악취를 풍기는, 이 고집불통 내자식은, 주차 딱지나 받고 더러운 구두를 신고 다니고 연애 관계도 복잡한 어른 남자가 결코 아니다. 내 눈에는 아이가 이제까지 살며보여준 모든 모습이 하나로 합쳐져 보인단 말이다. 윌을 보면 눈물이 차오를 만큼 벅찬 사랑으로 품에 안았던 아기가 보였다. 내가 또 하나의 인간을 창조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그런 마음으로 처음 만난 아기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며 내 손을 잡으려 손을 뻗던 꼬마가 보였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분노로 눈물범벅이 되어 흐느끼던 소년이 보였다. 그 여린 속내가 그 사랑이 지나간 모든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런데 윌이 나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한 건, 바로 그 모든 것이다. 다 큰 남자만이아닌 그 어린 소년, 그 모든 사랑, 그 모든 지난 일까지를 다 죽여없애달라고 한 것이다. - P172
"자. 됐어요." 나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죠. 저녁 일과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클라크,"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윌의 얼굴이 그늘져 정확히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냥 좀 있어요. 잠깐만."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눈길을 내리깔고 휠체어를 살폈다. 혹시 그의 몸이 어디 끼었거나 내가 뭘 잘못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난 괜찮아요. 그저......." 창백한 달빛이 어두운 양복 상의에 대조되어 두드러져 보였다. "그냥 아직은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냥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그는 말을 삼켰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봐도, 얼마나 힘겹게 하는 말인지 알 수있었다. "그저.....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데리고 콘서트에 다녀온남자로 있고 싶어요. 그냥 몇 분만 더." 나는 잡고있던 문손잡이를 놓았다. "그래요." 눈을 감고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더 거기 함께 앉아 있었다. 달빛 젖은 언덕 위 성채의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채, 기억 속 음악에 빠져든 두 사람으로. - P258
포장지에는 원색의 치파오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보자마자 아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무늬를 써서 뭔가 걸치고 다닐 만한 걸 만들 수도 있겠다. 리본을 푼 뒤 훗날 쓰려고 따로 챙겨두었다. 포장지를 벗기고 얇은 속포장지까지 뜯자, 기이할 정도로 낯익은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가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이었다. 내 손에 검은색과 노란색 줄무늬 타이츠가 들려 있었다. 성인용 사이즈에 불투명한 양모 재질이었는데, 어찌나 부드러운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 믿기지가 않네요." 내가 말했다. 벌써 깔깔 웃음이 터져나왔다. 기쁨에 벅찬, 뜻밖에 터져 나온 그런 웃음. "아, 맙소사! 이걸 대체 어디서 구했어요?" "주문 제작을 했죠. 새로 산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로 그 여자한테 하나하나 내가 직접 주문했다는 걸 알면 아마 뿌듯할 겁니다." "타이츠?" 아빠와 패트릭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타이츠란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타이츠를 쳐다보았다. "있잖니.루. 아무래도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딱 저렇게 생긴 타이츠가 분명 있었던 것 같구나." 윌과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환하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입어볼래요." 내가 말했다. "이런 세상에. 벌집에 들어간 꼬맹이 같은 꼬라지가 되겠구만." 아빠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오, 버나드, 저 애 생일이잖아요. 당연히 입고 싶은 건 뭐든지 맘대로 입어봐야죠." 나는 밖으로 달려 나가 복도에서 타이츠를 입었다. 발끝을 뾰족하게 내밀고 그 황당한 몰골에 찬탄했다. 내 평생 이렇게 행복해지는 선물은 처음이다. 나는 다시 걸어 들어갔다. 윌이 조그맣게 환호성을 올렸다. 할아버지가 테이블에 머리를 찧으셨다. 엄마와 아빠는 폭소를 터뜨렸다. 패트릭은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얼마나, 얼마나 좋은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생각도 못 하겠어요." 내가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나는 한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에 얹었다. "진심이에요." "그 안에 카드도 들어 있어요." 이 말했다. "나중에 열어봐요." - P281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사람의 몸이 이토록 친숙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민첩하고도 전문적인 손길로 튜브를 갈아줄수 있고, 하던 대화를 술술 이어가면서도 벗은 상반신을 부드러운 스펀지로 닦아줄 수 있었다. 심지어 윌의 흉터를 봐도 소스라치지않았다. 한참 동안은 그걸 볼 때마다 그가 언제라도 자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만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냥 윌이었다.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짓궂은, 총명한, 재미있는 윌. 잘난 척하며 일라이자 둘리틀을 교육하는 히긴스 교수 역할 놀이를 즐기는 월. 그 몸은 이제 당연한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끔씩 중간에 처리하고 지나가야 할 일 같은 것. 그러니까 윌에게서 그나마 재미없는 부분 정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 P285
나는 앞좌석 사이로 몸을 뻗어 셔츠를 걷고 그 밑의 작은 거즈를떼어냈다. 거기, 월의 하얀 피부에서 도드라지는 까만색으로 흑백줄무늬의 먹물 사각형이 있었다. 하도 작아서 두 번 다시 보고나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Best before: 19 March 2007 (유통기한: 2007년 3월 19일까지)
나는 타투를 노려보았다. 웃음이 좀 나다 말았는데,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이거 혹시......." "내가 사고 당한 날짜 맞아요."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 미치겠네. 제발 질척거리지 맙시다. 클라크, 웃자고 한 거니까." "웃겨요. 정말 거지 같이 웃겨요." "네이선이 아주 재미있어할 겁니다. 아, 진짜. 그런 표정 하지 말라니까. 내가 뭐 완벽한 몸을 망치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윌의 셔츠를 다시 내려주고 돌아앉아서 시동을 걸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자기 상태와 타협하려는 걸까? 아니면 자기 몸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일까? - P332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고래들하고 수영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물론당신이 그런다면 내심 무척 좋아하겠지만요. 그게 아니라 대담무쌍하게 살아가라는 말이에요. 스스로를 밀어붙여요. 안주하지 말아요. 줄무늬 타이츠를 당당하게 입고 다녀요. 그리고 누구 턱없는 남자한테 굳이 정착하고 싶다면, 꼭 이 돈 일부를 어딘가에 다람쥐처럼 챙겨둬요. 여전히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호사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가능성을 당신에게 선사한 이가 바로 나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에 맺힌 뭔가가 조금 누그러졌어요. 이게 끝입니다. 당신은 내 심장에 깊이 새겨져 있어요. 클라크. 처음 걸어 들어온 그날부터 그랬어요. 그 웃기는 옷들과 거지같은 농담들과 감정을 숨기는데는 형편없이 젬병이었던 당신이 걸어 들어온 그날부터 말이에요. 이 돈으로 당신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지 몰라도, 당신은 내 인생을 그보다 훨씬 더 많이, 크게 바꾸었어요. 내 생각은 너무 자주 하지 말아요 당신이 감상에 빠져 질질 짜는 건 생각하기싫어요. 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사랑을 담아서, 윌
눈물 한 방울이 내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테이블에 툭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뺨을 훔치고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시 시야가 선명해질 때까지 몇 분이 흘렀다. "커피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내 앞에 다시 나타난 웨이터가 물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웨이터는 내 생각보다 젊었고, 희미하게 풍기던 도도한 태도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파리의 웨이터들은 카페에서 우는 여자들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라는 훈련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코냑 한 잔?" 그는 편지를 슬쩍 쳐다보더니 뭔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미소로 답하며 내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는...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나는 계산을 하고 편지를 조심스럽게 주머니 깊이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카페를 등지고 나서면서 어깨에 걸친 가방을 고쳐 메고 향수 가게를 향해, 그 너머로 펼쳐져 있는 드넓은 파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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