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인물이 주체적인 개인으로 경험하고 행동한다면 개성과 깊이는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픽션과 현실 양쪽에 다 해당하는 얘기다. 주체적인 경험과 행동의 중요성에 비하면 그 인물이 푼수 끼가 얼마나 있는지, 어떤 카페인 음료를 좋아하는지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의외로 많은작가 지망생들이 이 점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기실 이것은 예비작가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흔한 인지 오류 중 하나다.
우리는 모두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거나 묘사할 때에는 그들이 경험 능력과 행동 능력중 한쪽만을 지녔다고 착각하기 쉽다.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는 인간이 부지불식간에 타인을 ‘상처받기쉬운 감수자‘와 ‘사고하는 행위자‘ 둘 중의 하나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웨그너가 제자인 커트그레이와 함께 집필한 책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에서든 사례를 조금 변형해서 소개해보자면 이렇다.
어린 소녀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느 기업최고경영자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져 상대를 망신 주었다고 상상해보자(물론 최고경영자가 딱히 얼굴에 케이크를 맞을 만한 잘못은 저지른 게 없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은 당황하고 소녀를 나무라겠지만 심각하게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이 코믹하다고 여기고 살짝 웃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반대로 기업 최고경영자가 다른 사람들이보는 앞에서 어린 소녀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져 망신주는 장면을 그려보자(물론 소녀가 잘못한 게 전혀 없는상황이다). 이제 옆에 있는 사람은 놀라 충격을 받고 최고경영자의 황당한 행동에 격분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 소녀를 행위 능력이 부족하고 경험 능력이 큰 존재로, 최고경영자는 행위 능력은 크지만 경험 능력은 모자란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에게 케이크를 던지는 소녀의 일화를 소설에 쓴다면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소녀의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까다로운 식성, 최고경영자의 괴팍한취향과 묘한 습관을 자세히 서술하면 그들이 보다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물론 그 방법도 효과가 없지는않다. 거기에 더해 나는 소녀의 행위 능력과 최고경영자의 경험 능력에 공을 들이기를 권한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 실감나는 존재로 보일 것이다.
소녀는 왜 케이크를 던진 걸까? 그녀는 그 순간 행동한 사람이고 거기엔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 남들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이유라도 괜찮다. 사실다른 사람들이 동의하기 힘든 이유일수록 소녀의 개성이 그만큼 도드라진다. 케이크를 맞은 최고경영자는 기분이 어떨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이성을 잃고 소녀의 뺨을 한 대 치기 직전일까? 소녀의 아버지를 몇 달뒤에 해고해야겠다고 싸늘히 결심했을까? 아니면 참석하기 싫은 파티를 거절할 명분이 드디어 생겼다며 속으로 안도하는 중일까? 꼭 전지적 작가시점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외면 묘사와 암시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독자가 짐작하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 - P156
사실 욕망과 두려움은 분리되지 않는다. 자기 자식과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과 그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인물의 고통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그의 욕망을 함께 전할 수밖에 없다. 욕망만 있는 인물, 두려움만 있는 인물, 쾌감만 느끼는 인물,
고통만 느끼는 인물, 가해자이기만 한 인물, 피해자이기만 한 인물이 많아질수록 당신의 원고는 문학에서 멀어지고 프로파간다가 되어갈 것이다. 프로파간다로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설득력 없는 인물들이 나오는 글에는 힘이 실리지 않기에. -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