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일리의 죽음을 나는 쉽사리용서할 수 없다. 용감하고 재능 있는 청년이 글래스고대학에서 경력을 쌓을 기회를 내던지고 파시즘과 싸우러 달려왔다. 그리고 흠잡을 데 없는 용기와 기꺼이 나서는 자세로 전선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그를 감옥에 던져 넣고 방치된 동물처럼 죽어가게 했다. 피가 낭자한 거대한 전쟁 한복판에서 개인의 죽음을 가지고 지나치게 호들갑을 피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북적거리는 거리에 비행기가떨어뜨린 폭탄이 수많은 정치적 박해보다 더 많은 고통을불러온다. 그러나 스마일리의 죽음 앞에서 화가 나는 것은그것이 철저히 무의미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죽는 것•••••• 그래, 그것은 이미 예상한 일이다. 그러나 하다못해 상상 속의 죄목도 없이 순전히 맹목적인 앙심 때문에 감옥에 갇혀 방치된 채 혼자 죽어가야 했다는 것, 이것은 다른 문제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스마일리의 사례가 예외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 P260

 내가 정말 보잘것없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 이 전쟁이 내게 남긴 기억은 대부분 흉악한 것이지만,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스페인 내전은 어떻게 끝나든 살육과 물리적 고통을 차치하더라도 결국경악스러운 재앙이 될 테지만, 이런 재앙을 언뜻 목격했을때 그 결과가 항상 환멸과 냉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묘하게도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인간의 품위를 더 믿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설명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일을 다룰 때는 누구도 온전히 진실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신이 직접 본 일을제외하면, 무슨 일에든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게다가 사람들은 누구나 글을 쓸 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는어느 한쪽 편에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혹시 내가 앞에서 아직 이 말을 안 썼을지 모르니 여기에 쓰겠다. ‘나의 당파성, 착오, 내가 본 것은 사건의 한 면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왜곡을 주의하라.‘ 스페인 내전 중이시기를 다룬 다른 책을 읽을 때도 항상 똑같은 점을 주의해야 한다.  - P282

그다음은 영국 잉글랜드 남부의 풍경은 십중팔구 세상에서 가장 말쑥할 것이다. 그쪽을 지날 때면, 특히 항구를 오가는 기차에서 호화롭고 푹신한 좌석에 앉아 평화롭게 뱃멀미를 다스리는 중이라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는 한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할 필요 없다. 내일 아침에도 우유가 문 앞까지 배달될 것이고, 금요일에는 《뉴스테이츠먼》이 발행될 것이다. 산업도시는 아주 멀리 있고, 그곳의 연기와 불행은 둥근 지표면 뒤에 가려져 있다. 이곳에는 내가 어렸을 때 알던 영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철로를 놓으려고 깎아놓은 길은 야생화로 뒤덮였고, 깊은 산속의 초원에서는 광택이 나는 커다란 말들이 풀을 뜯으며 명상에 잠긴다. 천천히 흐르는 개울가의 버드나무, 느릅나무의 초록색 품, 텃밭의 참제비고깔.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런던 외곽의 크고 평화로운 황야, 진창 같은 강 위의 바지선, 친숙한 거리, 크리켓 경기나 왕족의 결혼식을 알리는 포스터, 중산모를 쓴 남자들, 트래펄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옷의 경찰관, 이 모두가 깊고 깊은 영국의잠에 빠져 있다. 가끔 나는 우리가 이 잠에서 영영 깨지 못하다가 폭탄의 굉음에 화들짝 놀란 뒤에야 깨어날까 봐 두렵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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