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만큼 국가 발전의 주요 원동력인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한다. 국가 예산의 83%가 석유 수출로 인한 수입에서 발생한다. 석유로 벌어들인 수입은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관대한 복지국가의 자금줄이 되어주는데 국가는 이를 활용해 국민에게 무상교육, 무상 의료, 공공분야 일자리 등을 제공하고 주거, 식료품, 에너지에 대한 보조금도 지원한다.
그러나 2014년부터 유가가 폭락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나라의 안정성이 문제가 될 위기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은 영문 앞글자를 따 MBS라고도 불리는 젊은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제시한 최근의 정치적, 경제적 개혁 정책을 이해하게끔 해준다. MBS는 2015년에 국왕이 된 부친 살만 빈 압둘아지즈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오른 인물이다.
MBS의 왕세자 즉위는 새로운 세대로 권력이 교체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왕국의보수적인 이미지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을가진다. MBS는 거리에서 도덕 경찰을 없애고, 공공장소에서의 성별 분리를 완화하고, 여성들의 운전을 허용하고, 영화관을 세우고, 관광업의 문을 활짝 열었다. 또 경제적으로는 2016년에 공식적으로 ‘비전 2030‘
을 출범시켰다. 이는 투자자들을 유치할 목적으로 더욱 다양하고 경쟁력을 갖춘 경제시스템을 구축하고, 석유 이후의 세상을 준비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거대 개혁프로그램이다. - P169

끝나지 않은 쿠르드족 문제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쿠르드족은 15와 전쟁을 치르거나 각국의 영토를수호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자치권이커지면서 튀르키예 정부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쿠르드족은 아랍인도, 투크르족도, 페르시아인도 아니지만 페르시아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한다. 이들 대다수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지만소수의 시아파 예지디족, 심지어 기독교인도 존재한다. 기원전 9세기 무렵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정착했던 쿠르드족은 이후 메디아로 이동했고오늘날에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튀르키예 등 4개 국가의 접경지대에 2,500-3,500만 명의 인구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인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없는 민족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조인된 세브르 조약은 쿠르드족의 자치구 설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은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이유로, 유럽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이유로 쿠르드족의 요구를 외면했다. 반면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얻어냈다. 오늘날 앞서 언급한 4개 국가에 주로 모여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그들이 속한 국가의 헌법, 법치주의에 대한 존중 여부, 최근의 지정학적변화에 따라 천차만별의 대우를 받고 있다.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튀르키예다. 튀르키예 인구 다섯 명당한 명은 쿠르드족(즉 1,500만 명)이며 이들은 튀르키예 영토의 30%에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튀르키예는 이들을 ‘산에 사는 투크르족‘이라고만 규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70년대 말 튀르키예 정부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쿠르드노동자당(PKK)이 창설되었고 이에 튀르키예 정부는 이들을 군사적으로 억압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던 중 2003년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바트당이 붕괴하면서 이라크내 쿠르드족 자치구(쿠르드족 500-600만 명 거주)가 정치적, 경제적으로자치권을 누리게 되자 튀르키예는 이것이 자국의 쿠르드족에게 희망을줄까 두려워했다. 이러한 이유로 튀르키예는 시리아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10년 넘게 이어진 시리아 내전은 쿠르드족의 자치권을 더욱강화했고 시리아 내 쿠르드족자치구를 ‘연방 민주주의‘ 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쿠르드족은 IS 전투원들에 맞서 싸웠고, 따라서 서구 진영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맹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19년미군이 시리아에서 철수하자 그들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 P184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팔레스타인을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로 나누고 예루살렘 주변을 국제적 정권이 관할하는 특별지역으로 정하는 분할안을 발표했다. 아랍인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지만 1948년 5월14일 유대 국가 건국위원회 의장이자 새롭게 수립된 유대 국가의 초대 총리가 된다비드 벤구리온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날을
‘나크바‘라고 부른다. 이는 아랍어로 ‘대재앙‘을 뜻하는 말이다. 약 75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웃 국가나 아랍의 지배를 받는 팔레스타인 영토로 강제 이주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웃 아랍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들을 물리치고 유엔 분할안이 규정했던 당초 국경선까지 영토를 확장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서부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1949년 전쟁이 중단되었을 때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스라엘의 경계를 나누는 전선에는 ‘그린라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통제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통제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현재의 영토와 지정학적 입지를 갖게 된 것은 바로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 이어졌던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때문이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맞서 이때에도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두었고 1947년 당시의 팔레스타인 영토에 더해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전략덕 요충지인 골란 고원까지 차지하면서 새로운 지역을 차지했다. - P197

아브라함 협정,
팔레스타인을 배척하다

건국 73주년을 맞이한 해에 이스라엘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위대한 승자처럼 국제무대에 위용을 드러냈고 동시에 아랍 국가들과는 관계 정상화를 이뤄내는 듯 보였다. 이집트(1979년)와 요르단(1994년) 이후, 미국의 중재로 2020년 9월 15일 백악판에서 이른바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하면서 이스라엘은 두 걸프 국가인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과도 수교하게 된다. 이 협정의 명칭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공통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의 이름에서 유했다. 수개월 뒤에는 수단과 모로코와도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아브라함 협정이 지니는 이슈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전략적인 이슈다. 이스라엘은 2000년대 초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 이란을 중동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주요 요인으로 여겼는데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걸프 국가들 또한 동일한 관점을 공유했다.
공동의 적에 대한 인식은 이들 국가가 안보에 있어 서로 비공식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해주었다. 뒤이어 이들은 동지중해와 시리아에서 드러나는 튀르키예의 개입주의 정책을 일종의 팽창주의로 간주하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또한 이들은 무슬림형제단 역시 지역 불안을 발생시키는 위험 요인으로 여기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에서 떨어져 나온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역시 걸프만 군주국가들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위험 요소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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