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배치된 파수병들은 참호에 자리를 잡자마자 딱히 이렇다 할 목표 없이 엄청나게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파시스트들이 흉벽 뒤에서 우왕좌왕 총탄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끔 검은 점처럼 보이는 머리가 물색없이 노출된 채 순간적으로 가만히 있기도 했다. 사격을 해봤자 소용이 없음이 분명했다. 하지만내 왼편의 파수병이 곧 전형적인 스페인인답게 자신의 자리를 떠나 내게 가만가만 다가와서 총을 쏘라고 재촉했다.
나는 이 거리에서 이 라이플로는 우연이 아니고서야 사람을 맞힐 수 없다고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너무어렸다. 그래서 자기 라이플로 계속 멀리 보이는 검은 점들을 가리키며, 주인이 돌멩이를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개처럼 신이 나서 활짝 웃었다. 결국 나는 가늠쇠를 700미터에 맞추고 총을 발사했다. 검은 점이 사라졌다. 내 총알이가까이 떨어져 그가 화들짝 놀랐으면 좋을 텐데. 내가 사람을 향해 총을 쏜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막상 전선을 보고 나니 마음 깊이 염증이 났다. 이런 게 전쟁이라니! 우리는 적과 대면하지도 않았다! 나는 참호 아래로 머리를 숙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조금 뒤 총알 하나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 뒤편의 참호 방호벽에 콱 박혔다. 이런! 나는고개를 숙였다. 총알이 처음 나를 스치고 지날 때 절대 고개를 숙여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생 다짐했는데,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그렇게 한다. - P46

참호전에는 다섯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장작, 식량,
담배, 양초, 적. 겨울의 사라고사 전선에서는 중요도가 이순서였다. 적의 중요도가 맨 꼴찌. 언제나 기습 공격 가능성이 있는 밤을 제외하면, 누구도 적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있는 검은 벌레들에 불과했고, 우리 눈에는 가끔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양측 부대가 모두 진심으로 온 신경을 쏟는 일은 온기를 유지하는 법이었다. - P48

이때뿐만 아니라 한참 나중까지도 카탈로니아 의용군은 기본적으로 전쟁 초기 때와 같은 상태였다. 프랑코의 반란 초기에 여러 노조와 정당이 급히 의용군을 모집했다. 따라서 그들은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해당 정당에도 충성하는 정치조직이었다. 그럭저럭 일반적인 방식으로 조직된 ‘비정치적‘ 군대인 공화파 인민군이 1937년 초에 만들어졌을 때, 이론적으로는 정치적 의용군들이 그 조직에통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서류상의 조치에 불과했다. 인민군 부대는 6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라곤 전선에 나타났고, 그때까지는 의용군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스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장교와 병사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장군에서부터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봉급을 받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완전히 평등하게 어울렸다. 원한다면 사단을 지휘하는 장군의 등을 한 대 후려치면서 담배 한 개비를 청할 수도 있었다.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각각의 의용군이 위계질서가 아니라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은 있었지만, 명령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지 대 동지로 내리는 것이라는 의식도 있었다. 장교도 있고 부사관도 있었지만, 일반적인의미의 계급은 없었다. 서로를 계급으로 부르지도 않고,
계급장도 없고, 발꿈치를 부딪치며 경례를 하는 법도 없었다. 그들은 의용군 내부에 계급 없는 사회의 작동 모델을 일시적으로나마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다. 물론 평등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 경험상 평등에 가장 가깝기는 했다. 전쟁 중에 그런 평등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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