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농장장이 어떤 식으로 남에게 비품지든 간에 그가 나에 대한 호의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겨우 3일 전에 알게 됐을 뿐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같은‘ 한국 사람에 대한 도리였다.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을 통해 얻은 이익을 거절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의 원칙에 공감하지만 자신이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엔 노골적으로 차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문제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이런 지점이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혐오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입을 삐죽거리고 속으로는 딴소리를 할지언정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수 없다. 반면에 그들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감당할 수 없을만큼 거센 항의가 터져 나온다. 뒤틀리고 날이 서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 P218
아무리 렌즈를 들이대도 상처가 심각하게 보이게끔 찍을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손톱에 조금 세게 긁힌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고통을 작아 보이게끔 만드는가?‘ 하는 고상한 주제로 명상에 빠져들려는 순간 전날 찍은 사진들을 넘겨 보기 시작했다. 테크놀로지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심각하게 상처를 입은 건 내 자존심이지 몸이 아니었다. 사진에는 트럭에 실리기 직전의 돼지들이 찍혀있었다. 전부 상처투성이였다. 내 상처가 빨간 실 한 줄을 손가락 길이로 잘라 목에 붙여놓은 것 같다면 돼지들 몸에 난 상처는 두툼한 두께였고 온몸에 빼곡했다. 그 상처들을 쭉 보고 있었고 그것들을 남기는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내 목에 붙은 실 한 가닥을 보기 전까지는 그것들이 상처라는 피부에 남은 매질 자국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자돈사에서 폐사한 몸집이 제법 컸던 돼지를 촬영한 오래된 동영상파일이 있었다.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후여서 배가 잔뜩 불러 있었다. 화면은 빵빵해진 돼지의 배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돼지들이 번번이 화면을 가렸다. 잠시 후 화면 아래서 보라색 고무장화가 튀어나와 돼지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아, 좀 비키라고, 저리 좀 비켜!"
내 목소리였다.
"꺼져 이 새끼야! 꺼지라고 좀. 썅!"
화면 속 목소리가 사장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하게 들려서 끝까지 볼수 없었다.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