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서 리앤더가 커스틴에게 준 만화책은 ‘닥터 일레븐 1권 1호:스테이션 일레븐』과 『닥터 일레븐 1권 2호 : 추격』인데 악단의 다른 단원들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시리즈였다. 문명 몰락 후 20년이 되었을 무렵 커스틴은 이 두 권을 몽땅 외우다시피 했다. 닥터 일레븐은 물리학자다. 그는 작은 행성과 유사하게 설계된첨단 우주정거장에 산다.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이름의 그 우주정거장에는 깊고 푸른 바다와 바위섬들이 있으며 섬들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수평선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고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진다. 문명 몰락 전에 인쇄업에 종사했던 콘트라바순 연주자는 커스틴에게 이 만화책은 인쇄 질이 아주 좋고 기록용 보관용지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대량 생산된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출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가 누구였을까? - P59
이런 사소한 질투와 신경증과 진단받지 못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끓어오르는 반감이 1년 365일 함께 살고 함께 여행하고 함께 연습하고 함께 공연했다. 영원한 동료들과의 영원한 여행이었다. 그런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물론 우정과 동료애, 음악, 셰익스피어, 그리고 남은 로진을 누구의 활에 발랐느냐가 중요하지 않을 때 혹은 누구와 잤느냐가 중요하지 않을 때 느끼는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기쁨의 순간들이었다. 비록 누군가는십중팔구 사이드일 것이다 마차 안에 "타인은 지옥이다-사르트르"라고 펜으로 적어놓았고, 다른 누군가는 "타인은"을 지우고 대신 "플루트가"라고 써놓긴 했지만. - P67
오늘 아침 미란다는 테아로부터 다섯 통의 이메일을 받는다. 곧있을 리언의 아시아 출장을 위한 항공권과 호텔 예약 확인서다. 미란다는 아시아 출장 일정표를 작성하는 데 약간의 시간을 들인다. 일본, 싱가포르, 그다음엔 한국. 이럴 때면 지도를 찾아서 그 나라들을 여행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녀는 아직 캐나다를 떠나본 적이없다. 파블로가 일도 하지 않고 그림도 팔지 못해서, 그녀가 버는 돈으로 집세와 최소한의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고 나면 생활하기도 빠듯하다. 그녀는 싱가포르 발 서울행 항공권에 관한 정보를 일정표에 삽입한 후 다른 예약번호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렇게 하루의 업무가 벌써 끝나버린다. 오전 9시 45분에. 미란다는 한동안 뉴스를 읽다가 한반도 지도를 좀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자신의 프로젝트속 세상을, 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매달려온 그래픽 노블 시리즈 속 세상을 생각한다. 그녀는 책상 맨 위 서랍, 파일들 밑에 숨겨놓았던 스케치북을 꺼낸다.
--
스테이션 일레븐 시리즈의 주인공은 닥터 일레븐이라는 뛰어난 물리학자다. 외모는 놀라울 정도로 파블로를 닮았지만 다른 부분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는 미래에서 온 사람으로 징징거리는 법이 절대 없다. 위풍당당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다. 술은 그리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여자 운은 별로없다. 그의 이름은 그가 살고 있는 우주정거장 이름에서 따왔다. 근처 은하계에 살던 적대적인 문명이 지구를 점령하고 지구인들을 노예로 만들었지만, 수백 명의 반군이 우주정거장을 훔쳐서 도망가는 데 성공했다. 닥터 일레븐과 동료들은 스테이션 일레븐을타고 웜홀을 통과해 깊은 우주 속,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극중 시간 설정은 천 년 뒤로 했다. - P113
미란다는 그 두 사람을 알아본다. 누구보다 끈질기에 그녀와 아서를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들이다. "이봐요"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말을 걸면서 카메라를 잡는다. 그녀 또래로, 구레나룻이 있고 짙은 갈색 앞머리가 눈을 찌를 것만같다. "찍지 마요." 그녀가 날카롭게 말하자 그가 머뭇거린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뭐해요?" "찍을 건가요?" 그가 카메라를 내린다. "고마워요" 그녀가 말한다.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담배 한 개비 얻으러 나왔어요." "나한테 담배가 있는지 어떻게 알고?" "밤마다 우리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잖아요." "일주일에 6일이죠." 그가 말한다. "월요일엔 쉬니까." "이름이 뭐죠?" "지반 차드하리." "담배 한 개비 줄 수 있어요, 지반?" "물론이죠, 여기. 담배를 피우는 줄은 몰랐는데요." "지금부터 다시 피우려고요. 불은요?" "그럼 이게 그 첫 담배인 거네요." 그가 불을 붙여주며 말한다. 그녀는 못 들은 척하고 집을 올려다본다. "여기서 보니까 예쁘네요, 그렇죠?" - P1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