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포로 생활*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 준 것이 이 포로 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책에서 읽고 간혹 활동사진에서 볼 정도인 포로생활에 아무 예비지식도 없이 끌려들어 가게 한 것도 6.25 동란이 시퀸 일이었지만 6.25 동란이 일찍이 우리 민족사상에 드문 일이었다면이 위대한 50여개국의 소위 UN 포로로서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버리고 제네바 협정의 통치 구역으로 용감무쌍하게 몸을 던지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지나친 괴변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 P33

포로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에 대한 존경과 신망은 확실히 정상 상태를 넘어서 병적인 정도에까지 이르는 수가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 피난민이건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거러지건 아니 수용소 철망 밖에 있는 것이라면 소나 망아지 같은 짐승까지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황홀하고 행복스러운 구경거리였다. 한 걸음이라도 좋으니 철창 밖에 나가 보았으면! 이것이 포로들의 24시간을 통하이 잊혀지지 않는 몸에 박힌 염원이요 기도였다. - P36

나는 참다 참다 못해서 탄식을 하고 가슴이 아프다는 핑계로 다시입원을 하여 거제리 병원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임 간호원이 비 오는 날 오후에 브라우닝 대위를 데리고 찾아왔다. 나는 울었다. 그들도 울었다. 남겨 놓고 간 동지들은 모조리 적색 포로들에게 학살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아주 병이 들어 자리를 눕게 되었다.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나는 미인들에게 응원을 간청하였으나그들은 상부의 지시가 없이는 독단으로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나는 국군 낙오병 포로로 명망이 높은 반공 투사요 우국지사인 황 중위를 찾아가 보고 비밀 선봉대를 조직하려고 결심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시작하였던 것이다. 실로 기구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위하여는 싸워야 한다.
나의 시(詩)는 이때로부터 변하여졌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모두가 무서운 일이요. 꿈결같이 허무하고도 설운 일뿐이었다. 이것이 온전히 연소되어 재가 되기까지는 아직도 먼 세월이 필요한 것같이 느껴진다.
《해군》 (1953.6.) - P37

이미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었다. 절망이 완전히 그의 테두리를 만들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것은 비할 수 없는위험한 요동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불안한 어머니의 얼굴, 불안에의신앙, 가족에의 신앙, 눈물이 나올 여유조차 없는 절망, 그래도 가족을만나고 싶었다. 어머니만 만나면 무슨 좋은 지혜가 생길 것도 같았다.
기어코 순경의 충고를 어기고 억지로 나는 서대문 파출소를 나왔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는 나의 심장을 앗아갈 듯이 넓기만 하였다. 이대로 어디로 달아나 버릴 수 없는가. 이런 무서운 생각조차 들었다. 조선호텔 앞을 지나서 동화백화점을 지나 해군본부 앞을 지났을 때에 지프차 옆에서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나의 얼굴을 향하여 플래시의 광선이 날아왔다.
"어디로 가시오?"
"집에 갑니다."
나는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어디서 오시오?"
"북에서 옵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나는 한 발 쭈욱 앞으로 다가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실은 의용군에 잡혀갔다가 달아나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집은 바로 요 앞이올시다. 방금 서대문 파출소에 들려서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오는 길입니다. 집에 가서 한번 가족들 얼굴이나보고 자수하겠습니다."
라고 애걸하였다.
"응 그러면 당신은 ‘빨치산‘이로구료."
그는 대뜸 이렇게 말을 하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번쩍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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