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빚쟁이 심리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빚에 눌려 있을 때의 압박감과 갚아가는 과정의 고통과 다 갚았을 때의 복잡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쁘고 슬프고 서럽고 허무하다. 이상하게 불안해진다. 또 빚질 일이 생길까 봐. 혹은 앞으로 뭘 목표로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빚을 갚는 동안 이 아이는 견뎌야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화가 나도, 모욕을 당해도, 내일이 두려워도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도가고 싶었을 테다. 예쁜 사진도 찍고 싶고, 좋은 옷도 입고 싶었을 텐데 그걸 다 참아야 했을 것이다. 기댈 사람 하나 없었다면 늘 외로웠을 것이다. 도토리처럼 아무 데로나 굴러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했을 것이다. 이 조그만 아이가 홀로 맞서왔을 삶이 장하고 대견했다. 그 바람에 술을 한 잔 더 따라주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그래, 이제부터 뭘 할 건데?" - P453
그녀가 내민 잔에 커피를 채워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걸려들었다. 아니, 그 순간에 갇혔다. 그녀가 일순 낯설어지는 사술에 빠졌다. 비스듬하게 비쳐든 아침 햇빛이 그녀의 속눈썹에 가닥가닥 걸려 있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 안에서는 햇살이 은빛으로 산란했다. 두 뺨이 개울가에 내려앉은 첫눈 같았다. 귓불 아래로 돋아난 솜털들이 포실포실 고개를 든 눈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쓸어보고싶은 돌연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의 코끝이 장미 봉오리처럼 빨개지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재채기를 터트리기 전에 나는 시선을 비켰다. 베란다로 날아든 까마귀 한 쌍의 움직임에 눈을 붙박았다.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조금 전 나를 가둔 ‘그 순간‘이었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거렸다.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팽창하는 것처럼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뱃가죽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그녀가 여자로서 내 안에 들어온 첫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내게, 코가 빨개진 채 아침 햇살 속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기억돼 있다. - P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