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마이크(Mic)>라는 온라인 매체에서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는 이유를 의복의 역사적 측면에서 간략하게 다룬 적이 있다. 당시 그기사를 한국의 한 매체가 "주머니‘의 역사와 여성용 옷에 숨어있는 성차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옮겨서 소개했다. 그림데 번역된 기사 아래 달린 댓글들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주머니가 들어가면 핏(fit)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에 주머니 없는 옷을 더 선호한다"라는 의견이 눈에 많이 띄었다. 어차피 핸드백을 비롯한 다양한 백을 들고 다니니 굳이 바지 주머니에 힘들게 쑤셔 넣어 불편하게 다닐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자주 듣는 말이다. 사실 남자인 나도 요새는 주머니에 물건을 넣는일이 거의 없다. 동전을 쓰게 되지 않으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그저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 할 때 잠시 폰을 넣어두는 용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이크>의 글은 그렇게 욕을 먹을 글은 아니었다. 그글의 원제는 "이상하고, 간단하지 않은, 그리고 성차별적인 주머니의 역사(The Weird, Complicated, Sexist History of Pockets)"다? "여성용 옷에 숨어 있는 성차별"이라는 한국 기사의 제목은 영문 기사의 제목과 비슷해 보이지만, 원문 기사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조심스럽게 "여자 옷은 성차별적 역사를 갖고 있다"는 의미로 뽑은 제목을 "오늘날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는 것은 성차별이라는 식으로 옮기는 바람에 독자들이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이크>의 원문은 꽤 알차다. 지금의 현상만을 보면 남자와 여자가 형태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바지를 입어도 여자 옷에만 주머니가 없거나 ‘무늬만 주머니‘가 있는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여자와 남자의 옷은 적어도 우리가 입는서양식 옷의 경우 전혀 다른 계통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바지를 입고 있지만 여자 옷이 주머니를 무시하는 이유는 이렇게 다른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모습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 P94

그렇다면 현재 많은 나라에서 입는 서양화된 의복에서 볼 수있는 ‘바지‘는 언제 왜 등장했을까? 칼슨은 1330년대를 꼽는다. 바로 갑옷(armor)의 등장이다. 갑옷이 전통적인 의복 형태의 쇠자갑(chain mail)에서 판금갑(plate armor)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이를 입어야 하는 기사의 허리둘레, 팔다리의 길이 등을 정확하게 측정할 필요가 생겨났고 이게 ‘재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옷에는 주머니가 붙어 있지 않았다. 한국의 전통 ‘주머니‘가 옷과 분리된 작은 파우치 (pouch)를 의미하는 것처럼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던 ‘포켓(pocket)‘이라는 것도옷의 일부가 아니라 허리띠에 부착하는 형태였다. 이는 남녀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만 남자들은 허리띠에 가깝게 주머니를 차고필요할 경우 짧은 칼을 주머니와 함께 차고 다녔다면 여자들은주머니를 다리 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형태로 차고 다녔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럽의 남자들이 트렁크호스(trunk hose), 브리치스(breeches) 같은 본격적인 바지 형태의 옷을 입게 되면서 비로소 주머니가 남자 옷의 일부가 되었다. 이런 초기의 바지들은 패션아이템이 되면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모양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몸에 붙지 않아 여유 공간이 충분했다. 칼슨은 남자들의 바지가 커다란 통 모양이 되니 전통적으로 허리띠에 차던 주머니를 그 위에 얹는 것보다는 그냥 안으로 넣자는 생각을 한 재단사들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한다. 예전처럼 주머니를 바지 안쪽에매달지 않고 아예 꿰매 넣기로 하면서 우리가 아는 ‘바지 주머니‘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게 155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 P96

남자들이 바지와 재킷 곳곳에 주머니를 붙이고 다양한 물건을넣고 다니다가 이를 꺼내어 사용하는 동안 여자들은 중세와 다름없이 천 주머니에 물건을 한꺼번에 넣고 다녔다. 물건을 정리할수 있는 서랍처럼 작동한 남자 옷과 달리 한곳에 물건을 몰아넣으니, 필요한 걸 찾으려면 열심히 뒤져야 했다. 그래서 주머니 안에 물건이 있는데도 찾지 못하는 일이 있었고, 치마 속에 묶은 끈이 풀려 주머니를 분실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여자들이 중세시대 이후로 발전이 없는 주머니로 고생하는 동안 남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농담과 조롱이 섞인 글을 쓰곤 했다. 그런데 여성이 옷에 주머니를 부착하는 대신 손가방을 드는 쪽으로 발전한의복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비슷한 글은 여전히 나온다. 물론 이런 ‘혼돈‘은 여자들의 타고난 성격, 성향과 무관하게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반면 자라면서 주머니에 온갖 잡동사니를 넣고 다니던 남자아이들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남자아이들은 자라서 중요한 일을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허용해야 한다는 너그러운 자세가 어른들에게 있었다. 아이들이 주머니에 사탕, 개구리, 칼 따위를 넣고 다니면 그건 "세상을 탐험하는" "호기심 많은 태도로 여겨졌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유년기에 이를 허용해야만 물건을정리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였다. 남자아이들의 주머니가 이렇게 ‘호기심 많은 탐험가‘를 상징하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옷에 주머니가 붙었어도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았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의 네 자매 중 둘째인 조(Jo)는 흔히 여자들이 주머니-1860년대 여성의 옷에 드디어 사용할 수 있는 주머니가 붙었다 에 넣고 다닐 것으로 기대하는 물건들을 거부하며 자기가 쓴 원고 뭉치를 넣고 다녔다. - P106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방송한 <평범하지 않은 탐조인>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가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를 찾아가 그곳의 새들을 관찰하는 내용이다.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도 백인의 위협을 받는 흑인 남자가 앨라배마처럼 인종차별의 역사가 길고 지금도 많은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서 망원경을 들고 숲을 돌아다니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센트럴파크 사건 이후 앨라배마오두본 소사이어티의 초청으로 그곳에 처음 가서 탐조를 했지만,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시리즈를 만들게 되면서 꼭 그곳에 다시 가서 촬영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제작에 동원되는 촬영팀을 끌고그곳에 가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앨라배마주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셀마(Selma, ‘피의 일요일‘로 알려진 흑인들의 투표권 쟁취 행진이 시작된 곳)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셀마의 유명한 에드먼드 피터스(Edmund Pettus) 다리를 걸어서 건넜습니다. 제 가족은 북부 출신입니다만, 미국의 흑인들은 몇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남부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제 아버지 집안은 앨라배마에서 오셨죠. 그래서 제게는이런 개인사와 탐조 그리고 민권운동의 역사가 함께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 P87

당시 여성 참정권론자들을 보는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에는 홍미로운 부분이 있다. 이들은 여성 참정권론자들을 타고난 젠더를따르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있었고 그런 시각을 뒷받침할만한 성소수자를 골라내 공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게일 러플린(Gail Laughlin)이다. 당시 언론은 (레즈비언으로 알려진) 러플린이 여성들이 입던 주머니 없는 드레스를 거부하고 남자 옷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다닌다고 비난하면서 "러플린은 주머니가 없는 옷은 입지 않는다"고 조롱했다. 여자 옷에는 주머니가 없는 게 정상이라는 생각이 이미 확고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여성이 드레스나 치마가 아닌 옷을 입는 것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은 아주 오래 지속되어서 1990년대 중반까지도 미국 의회에서 여성 의원들은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세 명의 여성 의원이 이를 거부하면서 바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의 바지 정장은 두고두고 얘깃거리와 조롱감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남자들의 공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론은 못생긴 여자들이 하는 주장이라면서 이들이 남자들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는 ‘보기 흉한 버릇‘을 갖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페미는못생긴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런 공격이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졌는지 보여준다. - P113

그런 이유로 보먼은 백인이 만들어내고 중국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사용해온 폰트를 인종주의적인 폰트라고 낙인찍는데 조심스럽다. "타이포그래피를 통한 조롱은 중국인들이 받았던 많은 조롱 중 하나에 불과하다. 기본적인 인권을 얻기 위해 싸우는상황에서 자국 문화의 진정한 표현 같은 건 사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과연 인종주의적인 요소가 들어 있느냐를 판단하고 싶다면 아주 좋은 비유를 제시한다. "타이포그래피란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해당하는 시각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가령 액션 영화 예고편에 들어가는 성우의 목소리를 어린이용 만화에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책의 표지에 사용되는 폰트도 그 책의 성격에 따라 분명하게 다르게 선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타이포그래피는 목소리다. 그런데 외국인이 특정 문화나 인종의 말을 흉내 낸 가짜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인종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가령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주인공의 일본인 이웃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자. 이 일본인은 백인 배우가 연기했고 당시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인종주의적 조롱이 가득 담겨 있다. 보먼에따르면 완톤 폰트를 보는 미국인의 귀에는 그 장면에 등장한 일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 P142

뉴욕주 오번시에는 한국전쟁 기념비가 있다. 여기에 새겨진 영문(KOREAN WAR")은 완톤 폰트다. 이런 기념비의 존재는 완톤 폰트가 단순히 중국계에 대한 하나의 조롱이라고 말하기 힘들다는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걸 세운 사람들은 희생을 기념하고싶었던 것이지 자기 마을 사람들이 지키려고 싸우다 목숨을 잃은 나라의 문화를 조롱하고 싶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념비를 디자인한 사람, 승인한 사람, 이를 매일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중국 음식점에서 본 글씨가 아시아 문화를 대표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 경우는 인종주의적 조롱보다는 무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차별이 무지에서 비롯되는가? 이런 역사를 꾸준히 발굴하고 대중에게 알려야하는 이유다. - P144

마르티네즈 파티뇨 선수에 비하면 캐스터 세메냐의 경우는 다른 여자 선수들에 비해 호르몬상 분명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평균 여성들에 비해 몇 배나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운동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를 악용하려는 도핑은 경기조직위원회의 감시 대상이다. 문제는 이 호르몬을 주사하지 않았는데도 몸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다. 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2019년에 세메냐는 몸에서 평균 여성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테스토스테론이 나오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수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여성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언뜻 들으면 과학적인 판단인 것 같지만 과연 그럴까?
똑같은 일이 남성 선수에게 일어나면 어떨까? 테스토스테론이 평균보다 많이 나오는 남성은 남들보다 키가 큰 농구선수처럼그저 ‘신체적 조건이 유리한‘ 선수일 뿐이다. 엘리트 체육의 꽃인 올림픽은 물론이고, 프로 스포츠계는 그렇게 신체적 이점을 타고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같은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면? 그건 부당한 이점이라는 것이 스포츠중재재판소의 주장이다. <프로퍼블리카>의 데이비드 엡스틴 기자는 각종 운동경기 종목에서 기록 경신이 꾸준히 일어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설명하는 테드(TED) 토크에서 인류의 진화 덕분에 기록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외부 조건의 변화가 기록 경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중 특히 흥미로운 변화는 사람들이 ‘평균적인 조건의 신체가 모든 운동 종목에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근대 올림픽 초기의 생각을 포기한 것이다. 실제로 경기를 진행해보니 종목별로 유리한 신체가 따로 있었고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신체를 가진 선수를 발굴해서 훈련시킨 것이 기록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가령 20~40세 사이의 미국 남성 중에서 키가 7피트(213센티미터) 이상인 사람들을 모으면 현재 NBA에서 선수로 뛰고 있을 확률이 무려 17퍼센트다. - P158

하지만 이는 사실상 캐스터 세메냐를 두고 정한 기준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세메냐가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중거리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세메냐의 테스토스테론 양으로는 여자 종목에 참여할 수 없다. 세메냐를 겨냥한 결정이 아니냐는 비판에 부담을 느낀 탓인지, 육상연맹은 세메냐가 참여할 수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호르몬제를 복용해서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경기 6개월 전부터 낮추면 된다는 것이다. 이 결정이 가진 아이러니는 다른 선수들은 호르몬제를 포함한 약물을 복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는 반면 세메냐와 같은 간성의 선수들은 오히려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경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적인 근거를 이야기할 때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렇게도출된 결론을 보면 결국 세메냐를 비롯한 간성인을 ‘잡아내기‘ 위한 조치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세메냐는 아주 뛰어난 선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는 우사인 볼트 같은 존재는 아니다. 2023년9월 현재 여자 800미터 달리기 세계 기록을 보면 세메냐가 세운기록은 6위에 불과하다. 그는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운 적이 없다.
그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다고 해도 그게 압도적인 차이를만들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현재 세계 1위 기록 보유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야르밀라 크라토츠빌로바는 약물을 복용했다는 강한 의심을 받고 있다. 그 기록을 세운 것이 1983년이었고, 당시만 해도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국가 선수들의 약물 복용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1980년대의 약물검사가 허술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보면 백인 선수는 약물을 복용하고 뛰었다는 의심을 받아도 세계 기록을 인정하고 있는육상연맹이 흑인인 세메냐는 자신이 갖고 태어난 자연의 몸으로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약물을 통해 인위적으로 경기력을 떨어뜨리게 한 것이다. 게다가 선수 자신이 평생 살아온 몸의 호르몬을 강제로 떨어뜨리는 약을 6개월 동안 복용하는 것은 경기력을 저하시키는 것을 떠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점에서 육상연맹의 결정은 문제가 많다. 그런데 세메냐의 자격을 논하고 약물 복용을 강요하는 과정을 보면 흑인, 그것도 흑인여성의 몸을 보던 유럽인들의 오래된 습관에서 자유롭지 않음을알 수 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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