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주 오래된 습관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첫 기억 중 하나는 아버지가 방에서 TV를 보고 계신 장면이다. 아마도 권투 중계였던 것 같지만정확하지는 않다. 분명히 기억하는 건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계셨다는 것이다. 1970년대, 아니 1980년대에도 방에 두툼한 유리 재떨이가 있는 집이 흔했고,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걸 내가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머니가 그 시절 얘기를 종종 하셨기때문일 것이다. 옛날 기억은 그렇게 이야기 속에 등장하면서 생명이 연장된다.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 P8
이는 전기차처럼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제품을 팔아야 하는 기업들과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다. 테슬라를비롯한 전기차 업체들은 초기에 구매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위해 전기차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증명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담배 회사의 고객은 이미 습관-정확하게는 니코틴중독이 형성된 사람들이었다. 소비자들이 새로운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야 했던 테슬라와 달리 담배 회사들은 흡연자들이 습관을 끊지 않도록 적당히 다독여주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습관(귀가 후 전기차 충전)을 만들어내는 데 들어가는 노력과 기존 습관(스트레스받을 때 흡연)을 이어가도록 돕는 데 들어가는 노력의 차이는 물리학의 관성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담배 회사들이 소음을 일으켜서 의학계의 경고를 묻어버리는작업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버크셔 작전(OperationBerkshire)‘이다. 1977년 대형 담배 회사의 CEO들이 영국 모처에서 비밀 회동을 갖고는 대중이 흡연과 질병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듣지 못하도록 반대되는 연구를 지원해서 ‘논란‘을 만들어내자고 결의한 것이다. 이런 집요한 노력의 결과 흡연자들은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는 ‘의학계에서도 완전히 동의하지 않은‘ 문제라고 느끼게 되었고, 그 덕분에 불안을 달래가며 흡연 습관을 이어갈 수 있었다. - P13
멜라니는 필드스톤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 자신이 가고 싶었던, 그리고 당연히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세상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이 그곳을 거니는 장면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멜라니는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 아이들은자라서 버거킹과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필드스톤 아이들이 자라서 살게 될 고급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주민들이 들어올 때마다 문을 열고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문을 잡고 있을 운명임을 알았다. 이게 ‘자연계의 질서‘이고 엄연한 현실이며자신의 미래임을 깨달은 것이다. 멜라니가 필드스톤에 들어가자마자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이건 불공평해! 나는 여기 있기 싫어! 집에 갈래!"라고 소리를 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P42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그렇게 역경을 이겨내고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인데 단순한 서류 작성에서 좌절한다고 이를 설명하는 유명한 개념이 바로 ‘결핍의 덫(scarcity trap)‘이다. 사람들은 돈이나 시간 등의 자원이 부족할 경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게 결핍의 덫 이론으로서 여러 실험을 통해 증명되기도 했다. 이 개념을 소개한 기사에는 작은 실수로 어처구니없이 해고당한 여성이 당장 생필품이 부족해지자 신용카드로 물건을 급하게 대량 구입하고는 연체료를 납부하지못하는 사연이 등장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저지르지 않을 실수였지만 궁핍 상태에 처한 뇌는 그렇게 ‘조금만 더‘ 생각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능의 문제도 게으름의 문제도 아닌 그사람이 처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사람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해서 현재 상황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 P62
‘결핍의 덫‘을 다룬 기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외로운 사람들도 일종의 궁핍을 겪는다. 이들이 겪는 궁핍은 인간관계의 부족, 즉 친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신이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것. 그렇다 보니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어색해지는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대인관계에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집착이 친구를 사귀고 인간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막는다. 이는 그 개인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궁핍한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환경이다. - P63
그에 따르면 요즘 의대 진학생들 중에는 좋은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많기는 해도 약 20퍼센트 정도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은 학업을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고 했다. 물론이들을 위한 장학금은 있지만 기부자들이 ‘이 장학금은 반드시수업료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거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소중한 장학금을 공부가 아닌 곳에 쓰면 안 된다는정당한 조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활비는 ‘낭비‘라고 생각해서 지원할 생각이 없다면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은 장학금으로 수업료를 모두 면제받아도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부자들을 만나면 "아이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야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라고 설득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게 그 친구의 말이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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