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인들에게는 예전부터 그런 현실이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국제원조 단체들이 보기에 르완다는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하면 에덴동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대륙 어디를 둘러보나 냉전 시대의 열강을 등에 업고 약탈과 살인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가 즐비했고, 독재에 저항하는 반군들은 백인 개발 담당자들은 도저히이해할 수 없는 반제국주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쳐댔다. 하지만 르완다는북서쪽의 휴화산들처럼 조용했다. 도로 여건도 좋았고, 교회 출석률도 높았으며, 범죄율도 낮았고, 공중위생과 교육 수준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해외 원조 예산을 집행한다면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늘어놓는 능력보다는 매년 회계 연도를 마감할 때마다 누구나 만족할 만한 통계 보고서를 제출하는 능력에 따라 전문 관료로서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런 곳으로는 르완다가 제격이었다. 벨기에는 옛 식민지에 돈을 쏟아부었고, 프랑스도 아프리카에 프랑스어권 국가를 늘린다는 신식민주의 정책에 따라 1975년부터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또한 다른 어떤 나라 못지않게 르완다에 개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 밖에 워싱턴, 본, 오타와, 도쿄, 바티칸시티도 키갈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구호금을 보내왔다. 르완다 산지마다 은연중에 하비아리마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젊은 백인 일꾼들이 북적였다. - P97
문제가 많아질수록 새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다양한 형태의 후투족 야당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며 르완다 일 년 예산의 약60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를 원조하는 서방 국가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로비 활동을 벌였다. 운 좋게도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1986년 11월(오데트가 해고당하던 달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의 승자가 된서유럽과 북아메리카는 아프리카 종속국들에 민주화를 요구했다. 거의협박이나 다름없는 요구였지만 하비아리마나는 가장 비중이 큰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1990년 6월르완다에 다수당 체제를 도입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깜짝 선언을 했다. 개혁을 대하는 하비아리마나의 태도는 눈에 띌 정도로 무성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치였기 때문이다. 이제 권력을 놓고 공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르완다 전역에 안도감이나 흥분보다는 불안을 야기했다. 하비아리마나와 그의 권력에기대고 있던 북서쪽 주민들은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비아리마나가 공개 석상에서 정치 개방을 부르짖는 사이 아카주는 권력의 고삐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변화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억압의 강도도 더욱 강해졌고, 개혁을 옹호하던 지도자들 상당수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런 가운데 1990년 10월 1일 오후, 우간다에 본부를 둔 반군 조직인 ‘르완다 애국전선‘이 하비아리마나 정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독재와 부패와 ‘난민을 양산하는 추방 정책을 종식할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르완다 북동쪽 국경을 침공했다. - P104
전쟁은 각기 그 양상이 다르다. 후투 파워도 곧 특이한 양상을 띠기시작했다.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은 50명이 국경을 넘으면서 시작되었다. 곧이어 수백 명이 그 뒤를 따랐지만 전투 지역은 한곳, 즉 북동쪽 지역에 있는 국립공원 일부에 한정되었다. 싸울 상대가 르완다 애국전선이라면 그리로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침공이 있은 지 사흘 뒤인 10월 4일 밤, 키갈리 시내와 외곽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날이밝자 르완다 정부는 수도를 공격해 온 반군을 성공리에 물리쳤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전투는 없었다. 총성은 속임수였고 속임수의 목적은 분명했다. 즉 국가의 위기 상황을 과장해 국민들에 반군 동조 세력이 수도까지 침투했다는 인상을 심는 데 있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은 하비 아리마나 독재 정권에 다원주의의 싹을 자를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쥐어주었다. 그 무기란 바로 결속력을 다지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동의 적‘이라는 망령이었다. 국가의정체성이 곧 정치이고 정치가 곧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투치족은 모두 르완다 애국전선의 ‘동조자‘로 간주되었고, 그런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 후투족은 투치족을 지지하는 반역자로 몰렀다. - P105
은게제는 르완다의 소규모 무슬림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한 기독교지도자는 그가 속한 무슬림 공동체 사람들이 "품행도 아주 바르고 제노사이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투치족 무술림을 구하려고 애썼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은제의 진짜 종교는 ‘후투우월주의‘였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기사는 1990년 12월에 나온 「후투십계명」이었다. 후투 우월주의의 새로운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강령에서 그는 일필휘지의 솜씨로 함족 신화와 후투 혁명의 명분을 다시 살려내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서 호전적인 후투족의 순수성을 하나의 교리로 체계화했다. 처음 세 가지 계명은 르완다를 방문하는 백인과 후투족특권층의 취향을 통해 끊임없이 강화되어온 끈질긴 인식, 곧 투치족 여성의 미모가 후투족 여성의 미모를 능가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은게제의 주장에 따르면 투치족 여성은 모두 투치족 앞잡이였다. 투치족여성을 아내나 친구나 ‘비서나 첩으로‘ 둔 후투족 남성은 반역자로 간주해야마땅하고, 후투족 여성은 투치족 여성을 사랑하려는 충동에 빠지지 않도록 후투족 남성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런 다음 은게제는 성에서 사업으로 화제를 옮겨 ‘투치족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종족의 패권‘이라며 투치족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투치족과 거래하는 후부족역시 종족의 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논리는 정치 생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후투족이 ‘정치, 행정, 경제, 군사, 안보 분야의 요직을 모두 장악해야 했다. 나아가 후투족은 ‘공동의 적인 투치족‘에 맞서 일치단결해 1959년 혁명의 ‘후투 이데올로기‘를 공부하고 널리 알려야 하며, 이 이데올로기를 공부하거나 널리 알린다는 이유로 ‘후투족 형제를핍박하는 후투족은 누구든 반역자로 간주해야 마땅했다. 「후투 십계명은 전국으로 배포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르완다의 언론 자유‘를 입증하는 증거라며 은제의 기사를 치켜세웠다. 르완다 전역의 공동체 지도자들은 이 십계명을 법률과 똑같이 여기며 공동체 모임이 있을 때마다 큰 소리로 낭독했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바야흐로 불기 시작한 성전의 바람과 후투 이데올로기를 의심하는 후투족에 대한 가차 없는 질타는 르완다에서 가장 배우지 못한 시골 농부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자주 인용된 여덟 번째 계명은 "후투족은 더 이상 투치족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였다. - P111
1975년에 프랑스와 르완다가 체결한 군사 협정은 프랑스 군대가 르완다의 전투에 개입하거나 전투 훈련을 지휘하거나 치안 업무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분명히 못을 박았다. 하지만 미테랑 대통령은 하비아리마나를 좋아했다. 게다가 무기 상인이자 한때 프랑스 외무부에서 아프리카 담당 위원을 지낸 미테랑의 아들 장 크리스토프 역시 그를 좋아했다. 군비지출로 르완다 재정이 고갈되고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르완다에서는 불법마약 거래가 성행했다. 군대 장교들까지 나서서 마리화나 농장을 조성했다. 장크리스토프 미테랑이 마약 거래를 통해 이윤을 챙겼다는 소문이 파다하다.)1994년 학살 직후 프랑스는 르완다에 막대한 군사 장비를 실어 날랐다. 1990년대 초반에도 프랑스 군대는 줄곧 르완다의 원군으로 활동하면서 항공 교통 관제와 르완다 애국전선 포로들의 신문에서부터 일선 전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전권을 행사했다. - P113
르완다의 투치족이 대부분 그렇듯이 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도 처음에는 르완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반군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그녀의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늘 이곳 상황을 기준으로 삼았으니까요. 전 망명한 사촌들에게 ‘왜 돌아오려고 하는 거야? 그곳에 그냥 있어. 너희가 훨씬 더 잘 살잖아‘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때마다 그들은 ‘오데트, 너까지도 하비아리마나의 말을 흉내 내는구나‘ 라고 말했죠. 르완다 애국전선은 우리에게 망명생활을 하는 이들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야했어요.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이때껏 한 번도 진지하게헤아리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았어요. 이곳 투치족의 99퍼센트가 르완다애국전선이 공격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는애국전선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후투족은 우리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달았죠. 후투족은 우리를 배척했으니까요." - P114
조직을 정비한 후 극단주의자들이 무기를 대량으로 비축하면서 여기저기서 공격과 학살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후투족 젊은이로 구성된 민병대가 속속 꾸려져 ‘민방위 훈련을 받았다. 그중 ‘인테라함에는 가장 먼저 발족한 민병대였다. ‘함께 공격하는 이들‘이라는 뜻의 이 말은MRND와 아카가 후원하는 축구 팬클럽 이름에서 기원했다. 1980년대 말 경제가 무너진 뒤로 몇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빈둥거리며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병대 모집은 그들에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았다. 인테라함웨를 비롯해 그와 유사한 (후일 모두 인테라함웨에 흡수된) 조직들은 제노사이드를 무슨 신나는 놀이처럼 받아들였다. 후투 파워의 젊은 지도자들은 스포츠머리와 까만 안경에 알록달록한 파자마와 가운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며, 갈수록 늘어나는 군중을 상대로 종족 단결과 민방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 자리에는 으레 하비아리마나의 성스러운 초상이 그려진 대형 현수막이 미풍에 펄럭이고 공짜 술이 넘쳐났으며, 마치 최신식 춤이라도 되는 양 군사 훈련이 펼쳐졌다. 대통령과 그의 부인은 종종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인테라함웨 단원들은 은밀히 동네 단위로 조를 짜서 투치족 명단을 입수했다. 그러고는 집을 불태우고, 수류탄을 던지고, 마체테로 인형을 베는 은밀한 훈련에 들어갔다. - P118
흔히들 홀로코스트라는 산업화된 살인 행위가 인간의 진보라는 개념에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술과 과학이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진 유명한 문을 통해 곧장아우슈비츠로 안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이없었다면 독일인들이 그토록 많은 유대인을 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주체는 기계가 아니라 독일인들이었다. 르완다의 후투 파워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마체테를 휘두를 줄 아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기술이 뒤쳐졌다고 해도 제노사이드를 실행하는 데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사람들이 곧 무기였다. 이는 후투족 전체가 무기가 되어 투치족 전체를 살해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을 무기로 이용하면 수적인 면에서도 유리할 뿐 아니라 책임 소재마저도 유야무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모두가 연루된다면 누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느냐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뭔가에 연루되었다고 의심되는 후투족은 적의 동조자로 몰아세우면 그만이었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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