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에 섞여 있던 르완다인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가 비명을 지른 여인을 강간하려고 했나 봅니다." 그는 우리가 들은 함성은 곤경에 처했다는 신호로 르완다에서는 그소리를 들으면 함께 함성을 지르는 것이 의무라고 설명했다. "소리를 들으면 누구든 같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야 합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만일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경우에는 심문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산지에서 살아가는 르완다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 끝과 끝을 맞대고 마치 조각천을이어 맞추듯 이리저리 엇갈리며 움직였다. 그런 식으로 마을은 조그만 땅뙈기로 칸칸이 나뉘어 있고, 사람들은 이웃과 맞닿아 있는 각자의 땅뙈기안에서 서로 복작거리며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따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같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면 선생도 질러야 하고, 선생이 비명을 지르면 나도질러야 하지요. 누구든 달려가야 합니다. 소리를 듣고도 집에 가만히 있는 사람은 설명을 해야 합니다. 범죄자와 한통속이라 그런 건지, 겁쟁이라 그런 건지. 그러고도 다급해서 소리칠 때 누가 와주기를 바라는지 같은 질문에 말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간단한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관습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다급하게 소리를지르면 과연 우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우리도 함께 고함치며 서둘러 달려갈 수 있을까? 우리가사는 곳에서도 이런 식으로 강간을 저지하고 강간범을 붙잡는 일이 자주 있을까?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의 의무 체계가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살인과 강간이 하나의 규범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가 되고 이웃을 보호하는 사람이 ‘공모자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최루가스를 사용해 어두운 은신처에 몸을 숨긴사람들을 울부짓게 만들어 그 소리로 생존자를 찾아내선 무참히 살해하는 일이 정상으로 여겨진다면 어떻게 될까? 나중에 무고네로를 방문했을때 사뮈엘에게서 최루가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 계곡에서 여인이 외치던 비명 소리가 생각났다. - P48
하지만 후투족, 투치족이라는 이름이 문제였다. 이름에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름을 놓고 ‘계급‘이 어떻다느니 ‘지위‘가 어떻다느니 ‘신분‘이 어떻다는 둥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름이 두 종족을 구별 짓는 근원이라는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후투족은 농사꾼이었고 투치족은 목자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가축은 농작물보다 더 값이 나가는 재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축을 기르는 후투족도 있었고 농사를 짓는 투치족도 있었다. 하지만 투치족이라는 이름은 정치, 경제적으로 ‘엘리트‘의 동의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계층화는 1860년 투치족 출신 음와미 키게리 르와부기리가 르완다의 왕위에 오른 뒤 일련의 군사 원정을 통해 왕국의 영토를 거의 현재 수준으로 넓혀 지배권을다지면서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 P63
하지만 스피크는 처지가 딱한 흑인들과 함께 살면서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옮긴이) 최고의 혈통임을 나타내는 섬세한 계란형 얼굴, 큰 눈망울, 높은 코‘로 미루어, ‘보잘것없는 원주민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우수 인종‘을 발견했다. 이 ‘인종‘은 외투시족(즉 투치족)을 비롯해 많은 부족들에서 발견되었다. 다들 가축을 기르며 다른 종족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스피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외모‘였다. 그들은 오랜 혼혈의 결과로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피부가 검었지만 ‘콧날이 없는 펑퍼짐한 코가 아니라 아시아인처럼 콧날이 우뚝한 코를 지니고 있었다. 스피크는 모호한 과학 용어로 자신의 가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동시에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빌려 그들을 ‘셈족의 피가절반 흐르는 함족‘, 곧 사라진 기독교인의 후예로 규정하고 영국식 교육을 조금만 받으면 자신과 같은 영국인처럼 ‘모든 점에서 우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민주존 해닝 스피크의 이름을 아는 르완다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들대부분은 그의 터무니없는 이론의 핵심, 즉 유럽 인종을 가장 많이 닮은아프리카인이 지배자의 능력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러한 이론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함족 신화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라는 점을 부인할 르완다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후투 파워의 주창자 레옹 무게세라는 1992년11월의 유명한 연설에서 후투족에게 투치족을 은야바롱고 강(르완다를 지나는 나일 강의 지류-옮긴이) 너머 에티오피아로 되돌려 보내라고 촉구했다. 그는 그 문제로 굳이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1994년 4월 은야바롱고강은 죽은 투치족으로 넘쳐났고, 시체 몇만 구가 빅토리아 호수 기슭으로 밀려들었다. - P68
르와부기리왕의 죽음으로 투치족 왕족들 사이에 격렬한 계승권 분쟁이일어났다. 르완다 왕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고, 세력을 쥐고 있다가무력해진 지도자들은 상호 후원을 대가로 식민지 지배자들과 결탁했다. 그 결과 ‘이중 식민주의‘라는 정치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 아래서 투치족 귀족들은 독일인의 보호와 묵인에 힘입어 내부의 정적을 처단하고 후투족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했다. 국제연맹이 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르완다를 벨기에에 넘겨줄 무렵 후투족과 투치족이라는 이름은 서로 적대하는 ‘인종‘을 가리키는 의미로 굳어졌다. 벨기에인들은 그런 양극화 현상을 식민지 정책의 발판으로 삼았다. - P71
어쩌면 식민주의자들이 터무니없는 함 가설을 받아들여 르완다인들의 분열을 꾀했던 이유도 바로 이 르완다의 두드러진 국민성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벨기에인들은 굳이 르완다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척하지 않았다. 대신 기존의 문명에서 지배와 종속 개념에 부합하는 특성을 추려내자신들 목적에 맞게 고치는 쪽을 선택했다. 식민화는 폭력이고, 그러한 폭력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은 수두룩하다. 벨기에인들은 군사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과 성직자 외에 과학자도 르완다에 파견했다. 과학자들은 저울과 줄자와 양각 측경기를 들여와 르완다인의 체중과 두개골의 크기를 재고, 툭 튀어나온 르완다인들의 코를 비교 분석했다. 아니나다를까.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믿어온 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치족은 ‘거칠고 흉포한 후투족에 비해 더 ‘고귀하며‘ 귀족의 면모를 좀 더 자연스럽게‘ 풍겼다. 예를 들어 ‘코의 크기‘를 보면 투치족은 코 중앙이 후투족에 비해 약 2.5밀리미터가 더 길고 거의 5밀리미터가 더 가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로라하는 유럽인 관찰자들 다수가 투치족은 세련되고 고상하다는 맹신에 단단히 사로잡혀, 르완다의 지배 종족이 아틀란티스의 사라진 도시 멜라네시아에서 왔다는 등 스피크가 무색할 만큼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프랑스의 어느 외교관은 그들이외계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은 함족 신화를 지침으로 삼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제휴해 르완다를 통치하면서 인종에 따라 르완다 사회를 철저하게 개편했다. 그런 가운데 르완다 초대 주교 몬시뇰레옹 클라스가 후투족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우수한 혈통을 타고난투치족의 전통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1930년 그는 투치족 추장을 ‘무식한 후투족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온 나라를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어 반유럽 공산주의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투치족 추장만큼 유능하고, 똑똑하고, 적극적이고, 진보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백성들에게 환영받는 추장은 없다"라고 덧붙였다. - P72
식민지 이전 시대에 후투족과 투치족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의미를지녔건 간에 벨기에인들은 ‘출신 인종‘에 따라 르완다인의 실존을 정의하는 특징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도 대부분의 후투족과 투치족은 여전히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종족 간의 결혼도 성행했고, 산지에 사는키 작은 투치족‘의 운명이나 그 이웃에 사는 후투족의 운명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 우월한 종족과 열등한 종족이라는 개념을 들으며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한 국민으로서의 집단 정체성은 점점 퇴색했고, 그러한 인종 분열 정책 아래 투치족과 후투족은 각각권리와 피해를 주장하면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부족주의는 또 다른 부족주의를 낳는다. 벨기에도 ‘인종‘ 계보를 중심으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왈론인이 플라망어를 사용하는 다수를 몇 세기 넘게 지배했다. 하지만 오랜 ‘사회 혁명‘을 거치며 벨기에는 인구학 측면에서 훨씬 더 평등한 시대로 들어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르완다에 진출한 플라망인 사제들은 후투족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며 그들에게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그 무렵 벨기에 식민 정부는 유엔의 신탁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이는 식민 정부가르완다 독립에 필요한 기초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압력에 처했다는 의미였다. 후투족 정치 운동가들은 다수의 통치와 ‘사회 혁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르완다에서의 정치 투쟁은 평등 추구가 아니라 양극화된 사회에서 어느 인종이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초점이 맞춰졌다. - P74
르완다가 독립할 즈음 벨기에인들은 지지하는종족을 갈아치웠지만 그들이 마련한 새 질서는 옛 질서를 그대로 유지한채 사람들만 바꾼 데 지나지 않았다. 1961년 1월 벨기에인들은 새로운 후투족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임시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후투족 정당과 투치족정당이 균등하게 권력을 나누어 갖는 구도였지만 몇 달 뒤 유엔 진상조사위원회는 보고를 통해 르완다 혁명은 "어느 한 종족의 독재를 야기해 하나의 압제 정권을 또 하나의 압제 정권으로 대체하는 데 그쳤다"라고 결론 내렸다. 아울러 보고서는 "언젠가 우리는 투치족을 상대로 폭력이 행사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벨기에인들은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르완다는 1962년에 완전히 독립했으며, 그레구아르카이반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후투 독재 정권은 대중 민주주의로 위장했다. 르완다의 권력 투쟁은 후투 지배층 사이의 내분으로 발전하면서 과거에 투치족 왕족들이 벌이던 이전투구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르완다 혁명가들은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의 작가 네이폴의 지적대로 너나 할 것 없이 ‘흉내쟁이‘가돼서 자신들이 반기를 들었던 제도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했다. 그들은 과거의 지배자들이 압제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손에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카이반다 대통령도 루이 드라크제가 남긴 유명한 르완다 역사를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반다는 르완다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은 ‘한 국가 정서‘ 라는 라크제의 통찰력을 받아들이기보다 르완다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하는 두 나라‘로 인식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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