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열 명에 한 명꼴로 죽인다는 뜻의 ‘decimation‘이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1994년 봄과 초여름을 거치는 동안 르완다 공화국 인구의 10퍼센트가 희생되는(decimated)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살인 도구는 원시적이었지만(풀과 나무를 베는 데 쓰는 마체테 칼이 주를 이루었다) 살해 속도는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약 750만정도였던 전체 인구 가운데 최소한 80만 명이 겨우 100일 만에 무참히 살육되었다. 르완다 사람들은 종종 1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모른다. 르완다에서 사람들이 살해당한 속도는 홀로코스트 때 유대인들이 살해당한 속도의 세 배에 달한다. 르완다 학살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의 가장 효율적인‘ 대량학살 사례이다. - P7

남부의 산악 도시 기콩고로에 정전 사고가발생했다. 여섯 개의 촛불이 게스트하우스 바의 어둠을 밝혔다. 나에게술을 같이 마시자고 청한 군인 세 명의 눈은 시뻘건 오렌지 빛으로 이글댔다. 우리는 맥주 한 잔을 서로 돌려가며 마셨다. 맨 마지막에 맥주를 마신 사람은 나였다. 그런 식으로 군인들은 술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군인들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너무 취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무리 가운데 한 민간인은 술에 취하지 않기로 작심한 듯 보였다. 그 남자는 번들거리는 검정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꼿꼿이 앉아 있었다. 초연한 태도로 주위 상황을조용히 주시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마치 로봇처럼 영어 음절을하나씩 정확히 끊어 발음하면서 불쑥 나의 이름을 물었다. 나는 "필립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 손을 와락 움켜쥐며 말했다. "아하,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사람과 같군요."
"그 사람은 핍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 P9

피그미족은 르완다 최초의 거주자들이었다. 숲에서 살아가는 피그미족은 후투족과 투치족으로부터 한물간 부족이라는 이유로 천대받았다. 식민 통치 이전의 왕정 시대에 피그미족은 궁정 광대로일했다. 당시 르완다의 왕은 투치족이었다. 그 때문에 조상 대대로 궁정에서 일했던 피그미족은 제노사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투치족 왕족의 ㅍ나풀이라는 이유로 살해되는가 하면, 후투족이 투치족을 조롱할 목적으로 투치족 여자들을 욕보일 때면 강간범이라는 오명을 대신 뒤집어써야했다.
아마도 내가 게스트하우스 바에서 만난 피그미족 남자를 가르친 성공회 주교는 미개한 원주민을 교화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독교 교리를 입증해 보이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을지도모른다. 하지만 그 피그미족 남자는 그런 교리의 맹점을 간파했던 듯하다.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경험에 따르면 인간은 결국 모두 같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이자 원리, 즉 백인 사제의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가설을 마음에 아로새겼지만 결국 그 안에는 넘어서는 안 될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보편주의라는 이름 아래 그는 자신의 동족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밀림을 경멸하는 법뿐만 아니라 그런 유산을 업신여기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법을배웠다. 결국 그는 백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만이 자신의 이론을 입증해줄 고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그가 자신의 신념을 입증하는 데 걸림돌이 있다면 그런 짝을 만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사실뿐이었다. - P13

하지만 집단 폭력의 경우도 조직화가 필요하다. 집단 폭력은 막연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폭도들이 일으키는 난동에도 계획이 있기마련이며, 엄청난 폭력을 유지하려면 커다란 야심이 필요하다. 집단 폭력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새로운 질서를 떠받치는 이념의 경우 범죄 성향을 띨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매우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성격을 띈다. 제노사이드를 일으키는 이데올로기는 모두그렇다. 르완다의 경우에는 ‘후투 파워‘ 라는 뻔뻔한 명분 아래 제노사이드가 자행되었다. 고의로 인종 말살을 획책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중의) 피에 대한 욕망이 확실히 도움이 된다. 이는 르완다의 투치족처럼 남녀노소통틀어 125만 명가량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부차 인구 집단이 대상일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서 있던 문 안에서 벌어진 살육을 주도했던 사람들 같은 살육 기술자들이라고 해서 굳이 살인을 즐겨야 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들도 살인을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희생자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강해지면 결국에는 살인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P26

은콩골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르완다 문화는 공포의 문화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했던 말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면서 그의 얼굴에는 혐오감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기도라도 하게 해주고 우리를 죽여라‘, ‘길거리에서 죽기 싫다. 집에서 죽게 해다오‘
라고 말했지요." 잠시 뒤 그는 본래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런 압제와폭거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인 겁니다. 공포 어린 체념이야말로 제노사이드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었다는 증거 아니고 뭐겠습니까. 나는 그런 공포를 혐오합니다. 제노사이드의 희생자들은 단지 투치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왔던겁니다. 그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미 죽은 목숨이었던 겁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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