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그래도 그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아내는 건 그녀로변신하려던 여자를 알아내는 일과 연결될 겁니다. 일단은 거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세키네 쇼코는 타인의 신분을 원하는 여자가 주목할 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별안간 이사카가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화차여••••••"
"화차?"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혼마에게 이사카가 천천히 뒷말을이었다.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하느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젯밤에 집사람이랑 개인파산 얘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떠올랐어요. 옛날 노래예요. 「슈교쿠슈에 있던가."
돌고도는 불수레.
그것은 운명의 수레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네 쇼코는 거기서 내리려했다. 그리고 한 번은 내렸다.
그러나 그녀로 변신한 여자가 그것도 모르고 또다시 그 수레를 불러들였다. - P145

"그러고 보니 신용대출 대란도 어느새 십 년이 더 지난 일이군요. 쇼와 58년(1983년) 11월에 신용대출 규제법이 만들어져서 대출업자가 폭력적인 빚 독촉을 할 수 없게 된 후로는 우리 사무실에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 분위기도 많이 변했습니다. 말랑말랑해진 반면 더 넓게 확산되었다고 할까요. 비장한 느낌은 줄었지만, 그만큼 자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손쓰기 늦어버린 겁니다."
"오히려 더 질이 나빠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변호사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난 말이죠. 강의 같은 데서 ‘어쨌거나 야반도주를 하기 전에, 죽기전에 사람을 죽이기 전에 파산이라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청중들은 그걸 듣고 웃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닙니다. 파산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직장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호적이나 주민표를 옮기면 빚쟁이들에게 발각되니까 아이 학교도 가입학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숨죽이고 살아가는 거죠. 한 예로 원자력발전소에서 청소 작업을 하는 노동자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요.
과거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버려진 이들‘이 이삼십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수만은 없죠."
살아 있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버려진 이들의 무리. - P169

뭐든 꿀꺽 삼켜서 곧바로 동화시켜버리는 도쿄라는 도시에 들어와도 간사이 사람만은 신기하게 타고난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간사이 사투리에도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말끝이 이른바 ‘표준어‘로 바뀌어도 억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금세 간사이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혼마는 그런 면에 일말의 동경을 품기도 했다. 자기는 도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완전한 도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신의 근거로 삼을 만큼 강렬한 ‘고향‘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 P197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대도시로서의 기능뿐이다.
그것은 자동차와 매우 흡사하다. 제아무리 고급 사양에 성능이 뛰어나다 해도 사람이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자동차는 타고 다니며 편리하게 사용하고, 이따금 정비를 맡기고 세차를 해주고, 수명이다 되거나 질리면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그것뿐이다.
도쿄도 그와 마찬가지다. 어쩌다보니 이 도쿄라는 차에 필적할 만한성능을 지닌 다른 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있더라도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용하게 된 것뿐이지, 본래는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품 같은 것이다.
인간은 새것을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대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새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도쿄에 있는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뿌리 없는 풀이며, 대부분은 부모, 혹은 그 부모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뿌리의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의 대부분은 이미 힘을 잃었고, 이들을 부르는 고향의 소리도 이미 쉬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 같은 인간이 늘어만 간다. 혼마는 자기도 그중 한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P199

그때 계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내적 원인이 있을까.
그것은 분명 한 번에 오는 것일 리 없다. 상사에게 야단을 맞아 기분이 상했다거나, 실연당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마구 쇼핑을 한다거나하는 일상적인 것일 리도 없다. 그런 거라면 그나마 스스로 조절할 수있는 범위에 들어가니까.
그런 게 아니다. 그런 평범한 감정론으로는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이 정상적으로 원만하게 달리는 기관차를 서서히 위험한 언덕길로, 썩은다리가 걸려 있는 벼랑 끝으로 유도하는 조그만 선로 전환기. 하나, 또하나가 소리도 없이 변환되면서 진로를 바꿔나간다.
채무를 끌어안은 본인도 자기를 움직인 그 전환기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다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세키네 쇼코는 미조구치 변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 P216

이렇듯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 흔적을 남긴다.
인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벗어던진 웃옷에 체온이남듯이. 빗살 사이에 머리카락이 끼어 있듯이. 어딘가에 무언가가 남는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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