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박완서의 단편 「그 남자네 집에 나오는 대목이다. 감탄사가나왔다. 있는 그대로 사실 묘사만 정확해도 진실이 드러난다. 거짓으로 우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것도 아니라니. 눈물의 이중성에 관한 탁월한 보고다. - P101

평범한 여성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인식 능력과 지적적용력에 놀라는 경우가 많은 반면, 전문직 종사자나 여론 주도층 인사들은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고 여성학자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말한다. 나도 글쓰기 수업에서종종 느낀다.
넓은 의미의 주부들,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문학, 철학, 사회학 등 텍스트 이해가 빠르고 정확한 편이다. 정희진의 언어대로 "모욕, 불편, 고통이 일상"인 사회적 약자의 힘 같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림하는 건 타인과 부대낌의 연속이다. 불가해한남편과 행복과 번뇌의 근원인 아이들, 시금치도 싫어지게 한다는 시댁 식구까지 면면이 다 제각각이다. 관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타인의 목소리와 표정과 심경을 헤아리는 해석노동을 전담하게 된다.
아르바이트생도 감정 노동을 피할 수 없다. 부모의 다툼을 보고 자란 자식도 불안을 안고 산다는 점에서 ‘을‘의 입장은 마찬가지다. 억울한 것도 불편한 것도 복받치는 것도 궁금한 것도많아 신경 세포가 늘 예민하게 살아 있으니 ‘빨간 약처럼 스미는 문장이 많은 것 같다.
반대로 외부와 접점 없이 오직 학교에서 제한적인 관계를 맺고 공부만 한 사람이나, 주로 대접받고 산 ‘갑‘의 자리에 있는 전문직 종사자는 섬세한 표현이나 인식에 취약하다. 특히 시를 어려워한다. 아마도 슬픔, 기쁨, 불안, 전율, 울분 등 정서 작용으로인한 내면의 지층이 형성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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