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열린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에리히 케스트너
나는 글쓰기를 독학으로 배웠다. 처음부터 쓴다는 목적을 가진건 아니었다. 시작은 읽기였다. 그러니까 독학이 아니라 독서였다. 철학 책이나 시집, 평론집에 주로 손이 갔다. 공통점이 있다. 한 페이지를 읽으면 한두 개씩 밑줄 긋고 싶은 황금 같은 문장이 나오는 책들이다. "그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고 얻을 것은 세상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의 문장은 이상하게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 P9
문학 평론가 황현산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재미난 표현을 빌리자면, 빨리 쓰기 시작해야 글을 쓰기 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긴장한 가운데 생각나고 글이 글을 물고 나온다는 것, 그 엄정한 사실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이야기를 문장마다 곁들였다. 108배처럼 곡진한 반복진술이다. 쓰기의 문장들은 서로 충돌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하다. 그러나 글쓰기가 막히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저마다의 진실값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P18
행동하는 자만이 배우기 마련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내 식대로 수영을 글쓰기로 번역해 본다. 수영장 가기(책상에앉기)가 우선이다. 그다음엔 입수하기 (첫문장 쓰기). 락스 섞인물을 1.5리터쯤 먹을 각오하기 (엉망인 글 토해 내기). 물에 빠졌을 때 구해 줄 수영하는 친구 옆에 두기 (글 같이 읽고 다듬기). 다음 날도 반복하기. 모든 배움의 원리는 비슷하지 않을까. 결심의 산물이 아닌 반복을 통한 신체의 느린 변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펜을 움직여야 생각이 솟아나는 것처럼, 물속에서 팔다리를 부단히 움직이면 나도 수영을 배울 수 있을 텐데, 물에는 가지 않고 이렇게 책상에만 앉아 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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