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오는 올라와서 두어달은 이 공간에 적응하는 기간이었고 이제 차츰 밀착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메마른 바위에 포자가 날아와 붙었다가 미세한 습기와 바람과 햇볕을 받으며 삶의 거처를 만들어가는 이끼가 자라는 과정과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료함을 극복했다. 아침 해가 뜨면 텐트에서 기어나와 왕복 서른걸음이 되는 트랙을 한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몸을 풀었고 셋 동작을 실시했다. 팔굽혀펴기 동작에서 다리 오므리고 쪼그렸다가 일어나며 허공으로 펄쩍 뛰었다가 다시 쪼그리고 팔굽혀펴기로 돌아가는 동작이 하나였다. 이렇게 셋 동작을 겨우 열번밖에 못하다가이제는 열여섯번까지 늘렸다. 트레이너가 말하던 스무개를 채울작정이었다.
장마철이 지나자 무더위가 덮쳤다. 시멘트 덩이의 굴뚝은 달아올라 섭씨 오십도를 넘어섰고 한낮에는 육십도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 정도면 달걀이 반숙되는 온도였다. 따라서 운동은 새벽 다섯시쯤에 일어나서 여섯시 무렵까지가 적당했고 늦어도 일곱시쯤에는 마쳐야 했다. 코펠에 식수를 부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칫솔질을하고 박박 밀어버린 머리에도 물을 끼얹어 닦아냈다. 지난달부터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전동 바리캉을 올려 머리를 밀어버렸고 그뒤부터는 아예 면도기로 얼굴과 머리까지 한번에 밀었다. 밤에는 팬티 차림이었지만 낮에는 오히려 기능성 긴팔 셔츠에 트레이닝복을 걸치는 게 덜 뜨거웠다. - P101
이일철이 철도종사원양성소의 이학년이 되던 해에 만주사변이터졌다. 교실에 들어온 선생이 군에서 파견된 교관 장교를 소개했고 그는 지난주에 일어난 만주 류탸오후(柳)사건과 그 경과에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는 먼저 있었던 장춘의 완바오(산 수로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조선인 이민 농민들과 중국인들과의 마찰을 간단히 설명했다. 중국인들이 토지를 외지인에게 임대할 때 현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무효라는 규정을 속이고 계약한 뒤에 조선 농민들의 수로에 관한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측과 중국군의 작은 충돌이 있고 나서, 만주로의 조선인이민을 일본 진출의 선발대로 인식하던 일본 측은 이를 빌미로 중국이 조선인을 억압 침탈하고 있다는 선전을 조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진실이라 믿었던 조선인들이 경성은 물론 지방 도처에서 화교의 음식점이나 상점 농장 등을 습격했다. 사정을 알게 된 조선인 각 사회단체가 진상을 알리고일본 측의 선전에 속지 말라면서 조중 인민의 친선을 강조하고 나섰다. 물론 학교에 틀어박혀 기술교육을 받는 데 전념하고 있던 이일철이 이런 실정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일본은 진작만주 전역에 철도를 놓고 남만주철도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이로써일본인 및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관동군의 만주 주둔을 합리화하였다. 일본군 참모부는 만주의 실질적 점령을 위하여, 중국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할 목적으로 만주철도를 먼저 폭파했다고 선전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관동군 특무의 작전으로 실시된 자작극이었다. 교관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현 정세보고를 마무리했다.
"우리의 영용무쌍한 대일본제국의 관동군은 단지 오일 만에 요동성과 길림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오랫동안 종속되어왔던이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에 이르렀다."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