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지붕 위에 달린 텔레비전 수신용 위성 접시였다. 그녀는 한국의 방송프로그램을시청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나는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물었다. 물어보면서도 아마 드라마나 가요 프로그램이 아닐까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대답은 뜻밖에도 <세계는 넓다>라는 프로였다. 지금은 종영한 이 프로그램은 일반 여행자가 특정 여행지에서 찍은 동영상을 직접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가보고 싶은 곳이 참 많은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고, 직접 여행을 떠날 수 있는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공간에 갇혀 있는 삶에 대한 나의 무지와 몰이해를 깨달았다. 법적인 문제와 육체적 한계 때문에 제자리를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조차 늘 떠남을 희구하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어쩔 수 없는이유로 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라고 해서 경계 너머 넓은 곳으로나가고 싶은 욕망조차 접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욕망은 오히려 훨씬 더 간절한지 모른다. - P46
19세기 이후 선진국에 산업화와 근대화의 바람이 불면서 전통 문화와 경관은 소멸하기 시작했고 산업형 관광은 점차 활성화되어 갔다. 자신들에게는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것들 그리고 색다른 것들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장거리 여행으로 발현된 것이다. 문명을 갖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자신들의 순수한 모습을 찾고자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수 는 없으니 아직 산업화를 겪지 않은 가난한 나라로 가서 순수하고 덜 훼손된 자연과 문화를 보고자 한 셈이다. 사회학자 존 어리는 이를 관광객의 시선Tourist‘s Gaz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관광객들은 전통 유산을 지닌 어떤 여행지를 방문할 때 현지인들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일련의 기대감을 갖는다. 그리고 관광 회사와 지역 정부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경제적인 성취를 이룩하고자 관광객의 시선을 확대해 재생산한다. 그런데 순수한 타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고 하더라도 관광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 순수성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타자 역시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산업으로서의 관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타자가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에 맞게 적극적으로 개조된 타자, 때로는 완전히 ‘발명된 타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소위 재현된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 P58
고난을 수반하던 전통적인 여행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관광산업으로 발전하는 한편, 대중화되었다. 그 결과 현대사회에서는 여행과 관광이 엄밀한 구분 없이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행과 관광은 비슷하면서도 분명하게 다른 용어다. 관광은 잠시 둘러보며 구경하고 즐긴다는 의미가 강하다. 자신이 떠나온 곳과 친숙한 곳에 머물면서 잠시 낯선 것을 경험하는 데 초점을 둔다. 새롭고 특이한 것을 경험하긴 하지만,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다. 편안한 숙소에서 지내며 가능한 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으려 한다. 그래서 패키지관광상품 광고는 얼마나 고급 호텔인지나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지 혹은 한식이 포함되었는지를 피력한다. 특히 패키지관광에는 재현된 퍼포먼스를 경험하는 일정이 포함된다. 이는 관광객들을 위해 볼거리들을 인위적으로 마련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관광을 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국의 자본을 관광지에 투입해 관광객을 충족시킬 만한관광자원을 개발하고, 관광객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한다. 고급호텔이나 리조트는 물론, 어떤 경우에는 현지 문화를 재창조해관광 이벤트나 쇼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관광지에서 살고 있는 현지 사람들이 과거에 지니고 있던 생활양식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현재와는 상당히 유리된 삶인 것이다. - P60
반면에 여행은 객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동참해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색다른 낯선 세계에 동참해 그 사람들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문화를 접하고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둔다. 재현된 퍼포먼스보다는 여행지의삶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다. 관광과 여행의 또 다른 차이점은 여정의 구체적인 계획 수립여부다. 관광이든 여행이든 볼 것, 경험할 것을 미리 정해 놓음으로써 전체 여정을 짜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광은 정해진 시간과 가격에 꽉찬 일정을 소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출발하기 전에 정해 놓은 여정(만)을 모두 성취해 내려고 한다. •••••• 여행 역시 대략적인 여정을 짜서 무엇을 보고 체험할지 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반드시 계획한 것만 수행하고 돌아오지는 않는다. 마음과 머리를 열어 놓기 때문에 정해진 것 외에도 더 많은 것을 경험한다. 관광은 예기치 않은 경험을 최대한 막아서 안전성을 보장하려 하지만, 여행은 예기치 않은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만족감을 더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 P61
물론 여행에도 경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관광의 경계와다르다. 이쪽과 저쪽을 분리하지 않고 구멍이 뚫려 있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즉 차단막이 아닌 연결 통로로서 늘 열려 있고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경계다. 그래서 여행을 하다 보면 위험에노출되기도 하고, 불편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관광이 낯익은환경을 유지한 채 낯선 것들을 경험하려 한다면, 여행은 애당초낯선 환경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낯익은 것들을 찾아보려 하기 때문이다. 경계 너머의 문화를 어떤 관점으로 경험하는지에 있어서도관광과 여행은 다르다. 관광은 경계 안쪽과 바깥쪽의 문화를 비교하며 살펴본다. 그때 비교의 기준은 경계의 안쪽, 즉 나(여기)의 문화다. 관광은 색다름을 향유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계속 바깥쪽에서 경계의 안쪽에 없는 것들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가령 선진국 사람들의 경우 제3세계 지역을 관광하면서 자신들의 과거를 발견하며 회한에 젖거나, 그들만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를 확인하며 즐거워한다. 나와의 비교가 관광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비교가 지나쳐 문화의 ‘차이‘를 자칫 ‘우열‘로 나누고, ‘열등한 타자‘의 발견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 동남아시아를 관광하는 한국의 일부 장년층들이 더운 환경과 그 속의 고단한 삶을 과거 자신들의 어렵던 시절과 비교하면서 열등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그 예다. 한편 여행은 비교하지 않고 이해하려 한다. 시간적이고도 지리적인 맥락 속에서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때 이해의 기준은 나(여기)가 아닌, 그들(거기)이다. 여행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지 주민들의 입장에서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자는 다름을 확인하고 한 발짝 떨어져 비교하는것이 아니라, 다름을 만든 주체들의 노력과 결과를 공감하고 그 가치를 이해한다. 더불어 그에 비추어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해낸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핵심이다. - P66
프랑스 작가 미셸 옹프레는 그의 책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은 우리에게 치료제로 작용하기보다는 우리 존재에 대해서 정의해 주고,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준다. 우리는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에 더 익숙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잘 느끼고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이다. _미셸 옹프레, 『철학자의 여행법」
정체성은 고정되고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늘 새롭게 구성된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세상은 모두다르면서도 같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마크 트웨인 여행기:때 묻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 떠난 여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여행은 편견, 고집과 편협한 정신에는 치명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여행을 필요로 한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따뜻하면서도 해박한 식견은 평생 지구의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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