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사건 이후 그동안 알던 세상이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렇게 많은 노동자가, 더 정확하게는 하청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는다는 걸 알고 나니 이 나라는 ‘살만한 나라‘가아니라 정말 ‘이상한 나라‘였다.

"처음엔 아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거, 그것만 밝히고 싶었어요. 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회사 간부가 처음에 그러더라고요. 용균이가 일도 잘하고 성실한데 고집이 있어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사고가 났다고요. 용균이 잘못으로 사고가 났다는 거잖아요.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저는 믿었어요. 그래서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거고요. 혼자싸우기 힘드니까 공공운수노조와 함께한 거고요. 노조라는 걸 모르고 살았으니 처음부터 믿진 않았어요. 같이 하다 보니 믿음이가더라고요."

엄마는 본능적으로 아들을 믿었다. 아들이 잘못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해 아들의 시신을 냉동고에 넣어두고 꼬박 두 달을 견뎌냈다. 2019년 4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특조위 조사 결과는 엄마의 믿음이 옳았다는 걸 증명했다. 소음·분진 지역은 2인 1조로 작업해야 하는데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혼자 작업하도록 했고, 하청 노동자들이 28번이나 시설 설비 개선을 건의했지만 원청과 하청 사이에서 무시되었다."

"장례만 끝나면 남편 본가가 있는 시골에 내려가 살려고 했어요. 남편 건강도 안 좋고 하니까. 그런데 노동자는 계속 죽는데 앞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겠더라고요. 용균이 같은 사고가 계속 나는데 어떻게 모른 척 살 수가 있겠어요." - P46

태완이
1994. 7. 13. 1999. 7. 8.
대구에서 김동규·박정숙 부부의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만화영화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1999년 5월 20일 오전 11시 집 근처 골목에서 범인이 뿌린황산에 얼굴을 포함해 전신 3도 화상을 입었다. 병원에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으며 49일을 견뎌내고 같은 해 7월 8일 하늘나라로 떠났다.

태완이법
사람을 살해한 범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형사소송법 규정을 일컫는다. 법정최고형이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일부 성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법이 2011년 시행되면서,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죄에 대해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것은 법체계에 맞지 않다는 비판에 따라 2012년부터 살인죄에 대해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내용의 법안들이 잇따라 발의되었다.
이 법안들은 2014년 7월 태완이 사건 공소시효 만료를 목전에 두고 언론이 15년 전 사건을 다시 앞다퉈 보도하며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태완이법으로 불렸다. 태완이 사건 공소시효가 만료된 후인 2015년7월 24일 국회를 통과해 같은 달 31일 시행되었다. 이 법의 시행일을 기준으로 아직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이 되도록 해2000년 8월 1일 이후의 살인죄에 대해 공소시효가 없어지게 되었다. - P56

"통 봤나? 플라스틱 통? 빨간색이더나? 노란색이더나? 대답해야지.대답."
"까만색."
"까만 통이더나?"
"봉지."
"봉지? 비닐봉지?"
"까만 비닐봉지?"
"응."

박정숙 씨가 말할 힘조차 부족한 아이를 달래가며 받은 진술을, 수사팀은 강산성 화학물질인 황산을 비닐봉지에 부으면비닐이 금방 녹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근거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실험한 결과 시중에서 쓰이는 검은비닐봉지의 주성분인 저밀도 폴리에틸렌은 황산에 반응하지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태완이 말이면 다 된다고 해서, 태완이한테 물어보라고……, 그러면 범인이 밝혀질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그 잔인한 행동을 하지, 부모가 그 아픈 애 붙들고......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잖아. 15년뒤에 써먹으려고 했겠냐고요. 묻고, 묻고, 또 묻고, 애 어르고 달래고 나는 엄마도 아니에요 그거 생각하면." - P61

살인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안은 2012년부터 국회에 계류되어 있었다. 2011년에 성폭력과 관련한 형사특별법이 개정되며 일부 성범죄에 대해 먼저 공소시효가 폐지된 게직접적인 계기였다. 공소시효가 없어진 일부 성범죄의 법정최고형은 무기징역인데 사형이라는 법정 최고형이 규정된 살인죄에서는 공소시효를 그대로 두는 게 법체계상 맞지 않는 상태였다. 태완이 사건이 15년 만에 다시 여론의 주목을 끌면서 그동안 잠자던 법안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살인죄에대한 공소시효 폐지 법안이 태완이법으로 불렸다. 인터넷 카페등에서 태완이법찬성서명운동이 일어났다. 서명자가 4만 명을넘으면서 국회에 ‘태완이법 조속 통과를 위한 청원‘이 접수되기에 이르렀다. - P63

병실에 누운 태완이에게 기억나는 노래를 해보라고 하자 아이는 당시 유행한 텔레비전 만화영화 <지구용사 선가드>의 주제곡을 불렀다.

무지개다리 놓고 가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 없는 저 먼 우주는
아름답고 신비한 별들의 고향.

"우리 태완이 참 잘하네." 시력을 완전히 잃어 아무것도 볼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서도 천진하게 노래를 부르던 아들을토닥이며 가슴이 미어지던 그때를 박정숙 씨는 기억한다.

"매해 봄이 오면 갑자기 여기저기 아파서 힘이 하나도 없어요. 태완이가 사고 당한 게 봄이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지요. 이젠 가끔 소리 내서 웃기도 하고, 오늘 뭐해 먹나 반찬 걱정도 하고, 가족들끼리티격태격하기도 하고 그렇게 보통 사람들처럼 살 때도 많아요.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지 않고 지나가는 해는 없더라고요."

엄마는 세상의 시간에 따라 나이가 들어 이제 예순을 바라보지만 막내아들은 여전히 여섯 살에 머물러 있다. 병상에서부른 노래 속의 나라, 무지개다리를 타고 건넜을 아름답고 신비한 별들의 고향에서 태완이는 법의 이름이 되어 20여 년째 영원의 시간을 살고 있다. - P65

그동안 공소시효의 배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한했다. 2011년 전까지 우리 법에서 공소시효가 배제된 건 헌정질서파괴범죄(형법상 내란의 죄, 외환의 죄, 군형법상 반란의 죄, 이적의 죄)와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규정된 집단살해죄뿐이었다(‘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3조). 이 범죄들은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사회 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수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시간의 배제라는 예외는 그렇게 특별하다.
개인에 대한 범죄에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이 마련된 건2011년이 처음이다. 그런데 첫 단추가 잘못끼워졌다. 사형에 해당하는 가장 중한 범죄에는 시효를 그대로 둔 채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범죄에만 시효를 배제하는 입법을 먼저 해버린 것이다. 조두순 사건‘ 김길태 사건, 영화 <도가니>의 배경이 된 인화학교 사건처럼 아동과 장애인 등 약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이슈가 되자 18대 국회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법‘)‘ 및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법)의 처벌 기준을 대폭 높이고 공소시효를 손보았다. 그 과정에서 13세 미만의 여자 및 장애가 있는 여자에 대한 강간 및 준강간죄의 공소시효 배제가 도입되었다. 이 범죄들의 법정 최고형은무기징역이었다. 성폭법에서 가장 무거운 범죄인 강간살인죄 (법정 최고형이 사형이다)의 공소시효는 25년의 적용을 받는데, 무기징역이 최고형인 위 죄들은 공소시효가 없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관련 법률 체계 전반을 고려하지 않은 즉흥적 입법이었다. - P69

나치 청산에 이렇게 철저한 나라이니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 법안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니었다. 찬성255 대 반대 222. 팽팽한 찬반 대결이었다. 반대 논거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인간 세상에서 정의의 실현에는 한계가 있다. 공소시효는 검사, 판사의 오랜 시간이 경과한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 획득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오판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이다. 범죄 후30년이라는 세월은 입증을 곤란하게 하여, 오판이라는 국가적 불법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 

공소시효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오판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법치국가가 ‘어쩔 수 없이‘ 둘 수밖에 없는 제도라는 시효의본질에 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논거다. 굳이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 국회가 시효 문제는 신중해야 한다며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보류했을 때와 극명한 대조가 되기 때문이다.
여론에 떠밀려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던 소신 있는 주장은2011년 성폭법과 아청법 등 특별법 개정 때 했어야 했다. 시효는 형사소추의 주요 제도 중 하나이므로 그 배제 규정은 기본법인 형사소송법에 정하는 게 맞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개정이 쉬운 특별법에 공소시효 배제 규정을 먼저 만들고, 그 결과무너진 법적 균형을 뒤늦게 기본법 개정으로 바로잡으려다 ‘태완이 없는 태완이법‘을 낳은 것이다. 정의의 실현에는 한계가있다는 말로 태완이 부모를 위로하지 못하는 건 바로 그 이유에서다. - P72

구하라
1991. 1. 3. 2019. 11. 24.

광주에서 1남 1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2013년 한국 걸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도쿄돔에서 단독 콘서트를 여는 등 일본에서 케이팝 열풍을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했다. 2016년 카라 해체 후 솔로 가수로 무대에 섰고, 예능과 드라마에서도 활약했다. 전 남자친구의 데이트 폭력 사건 등으로 시련을 겪었으나 2019년 11월 일본에서 단독 투어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다시일어섰다. 그러나 귀국 후 불과 이틀 뒤인 24일, 서울 자택에서 스물여덟살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구하라법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에게 자식의 재산이 상속되는 것을막자는 취지에서 입법이 추진 중인 법안이다. 2020년 3월 구하라의 오빠 구호인 씨의 법률대리인 노종언 변호사가 ‘직계존속 또는 직계비속에 대한 부양의무를 현저히 해태한 경우도 상속결격 사유로 추가하고, 기여분 인정 요건을 완화하는 민법 개정에 관한 청원‘을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올렸고, 같은해 4월 3일 국민 동의 10만 명이라는 요건을 충족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 정식으로 상정되었다. 두 번에 걸쳐 법안 심사가 이루어졌으나 같은해 5월 말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21대 국회에서 위 청원과유사한 취지의 민법 일부개정안이 의원 발의되었고, 법무부가 2021년 6월부양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한 때 상속권을 상실시킬 수 있는 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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