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기분좋을 때는 한없이 다정한 아빠처럼 굴다 금방 변덕 부리며 모두를 긴장시켰던 것도. 정말이지 채운은 그 긴장이 지긋지긋했다. 아마 엄마도 그랬을 터였다. 그 어느 곳보다도 편안하지 않던 곳. 현관문 앞에서 늘 크게 다짐하며 들어가야 했던 곳이 채운에게는 ‘가정‘이었다. - P136
문득 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 뽕뽕 소리 나는 샌들을 신고 아장아장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왠지 네가 그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렸지. 부모들은 한 번쯤 다 겪는 감정이고.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 P182
지우는 화면 속 태오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러곤전자 펜으로 지우기 기능을 이용해 태오의 눈가에 어린 물기를 수정했다. 마치 그림 속 인물의 눈물을 닦아주듯 펜 끝으로 눈가의 물기를 지우고 또 채워나갔다.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 P200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
지우가 속으로 그 문장을 한번 더 되었다. 동시에 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에 연필을 쥐는 손이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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