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가 잠시 뜸들이다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그냥...... 이야기가 좋아서? 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 P66
채운이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삶에서 진부한 교훈을 추출해 남들에게 설파하기를 즐기는 사람. 그러나 본인은 그 교훈대로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티브이에 여행 프로그램이나왔을 때도 그랬다. 여행자가 러시아의 한 공예품점에 들어가 ‘마트료시카를 살 땐 맨 마지막 것까지 채색이 잘 되어있는지 꼭 확인하라‘고 하자 아버지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저것 봐라. 인간들은 틈만 나면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등쳐먹으려 한다. -...... -그러니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우리 삼촌은 오늘 가게 한쪽에 작은 산타 인형을 만들어놨어. 뿔소라로 산타 모자도 만들고. 요즘 지우가 종일 보는 거라고는 황량한 시멘트 벽면과온갖 배관, 전선, 비계뿐이었지만 지우는 그렇게 썼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여기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고향이기도 하고.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술술 새어나오는 거짓말에 조금 놀랐다. 사실 방학 첫날 소리에게 용식을 맡길 때 지우는 ‘방학동안 외삼촌 가게를 도울 거‘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랑 카페, 파도타기 용품 대여를 겸하는 곳인데 삼촌이 와서 일도 배우고 마음도 좀 추스르라 했다‘면서 지우는 ‘마음 좀 추스르라‘는 말이 소리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았고, 순간 그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좀 싫었다. 그때만 해도 소리와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줄 몰랐는데, 단지 용식을 돌봐주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우는 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의 신뢰감과 친밀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 P88
채운은 의아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애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군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곤 그애 어머니 앞치마에 오만원쯤 찔러줬을지도 모르지. 당장 집에 생활비도 잘못 주면서.‘ 평소 아버지는 본인이 잘못한 상황일 때 상대에게 과한선물을 줘서 그 순간 상대를 피해자가 아닌 부채자로 만들었다. 채운만 해도 아버지에게 받은 비싼 축구화며 유니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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