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사와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 매장 중앙부 잡지 테이블 쪽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창문이 절반 넘게 보였다. 그래서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무직 노동자, 택시, 조깅하는 사람,
관광객, 거지 아저씨와 개, RPO 빌딩 아랫부분이 보였다. 우리가 좀 적응이 된 다음에는 매니저가 매장 앞쪽 쇼윈도 바로 뒤까지 가도록 허락해 줘서 RPO 빌딩이 얼마나 높은지 보았다. 딱 적당한 시각에 그 자리에 가면 해가 우리 빌딩이있는 쪽에서 RPO 빌딩이 있는 쪽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P11

내가 쇼윈도에 가고 싶어 한 데는 햇빛이나 선택받을 가능성과 무관한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겠다. 대부분의 에이에프나 로사와 다르게 나는 늘 바깥세상을 아주 세세하게 보고 싶었다. 그래서 셔터가 올라가고, 바깥쪽 인도와 나 사이에 유리 한 장밖에 없어서지금까지는 가장자리나 귀퉁이밖에 못 봤던 수없이 많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자, 나는 순간 너무 들떠서 해와 해의 인자함조차 잊을 정도였다. - P19

그런데 계속 창밖을 관찰하다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에이에프들이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라고. 우리가 새 모델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제 자기 에이에프를처분하고 우리 같은 신형으로 교체할 때가 됐다고 생각할까봐 걱정하는 거였다. 그래서 부자연스럽게 걸음을 재촉하고일부러 우리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 거였다. 우리 창문에서 에이에프를 거의 볼 수 없는 까닭도 그래서였다. 어쩌면 RPO 빌딩 뒤쪽 도로에는 에이에프가 바글거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이에프들이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경로말고 다른 길로 가려고 온갖 애를 쓰는 듯했다. 자기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창으로 다가가는 일만은 막고 싶기 때문이었다. - P31

 아이가 택시와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택시 사이를 통해 아이를 계속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틈이 더 벌어져서 아이가 실은 에이에프와 같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년 에이에프였는데 세 걸음 뒤에서 아이를 따라가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소년 에이에프가 우연히 뒤처진 게 아님을 알았다. 아이가 늘 이런 식으로 걸으라고, 자기가 앞에 갈 테니 몇 걸음 뒤에 따라오라고 했고 소년 에이에프는 지시를 받아들인 거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 소년 에이에프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걸 알 텐데도, 나는 소년 에이에프의 걸음걸이에서 고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집을 찾았는데 나의 아이가 나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까 궁금했다. 이 둘을 보기전에는 에이에프가 자기를 멸시하고 싫어하는 아이와 같이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때 앞쪽 택시가 횡단보도 앞에서 속도를 늦추고 뒤쪽 택시가 바짝 붙어서는 바람에 더는 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오지 않을까 싶어 계속 지켜보았는데, 횡단보도위 인파 속에는 없었고 건너편 인도는 택시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 P33

"엄마 이상해 보이지. 저렇게 빤히 보고 있으니. 내가 네가마음에 든다고 말해서 그래.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했더니 저렇게 뜯어보는 거야. 미안" 나는 지난번처럼 언뜻 슬픔의 기색을 본 것 같았다. 조시가 물었다. "너 올 거지? 만약에 엄마가 된다고 하면?"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조시는 여전히 확신이없는 표정이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데 오는 건 싫어. 그러면 불공평하니까.
나는 네가 오면 정말 좋겠지만 네가 조시, 나는 싫어, 하고말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엄마한테 안 된다고 말할게. 하지만 너도 오고 싶지? 응?"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는 조시도 안심하는것 같았다.
"정말 잘됐다." 얼굴에 웃음이 다시 돌아왔다. "너도 좋아할 거야. 네가 좋아할 수 있도록 할게." 조시가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이번에는 신이 난 듯이 외쳤다. "엄마! 얘도 오고싶대!" - P43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띄었다. 오전 동안에 B3 셋이 오래된 에이에프들로부터아주 조금씩 멀어졌다. 옆으로 한 발을 살짝 움직일 때도있었고, 아니면 창밖에 있는 무언가를 구경하러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매니저가 정해 준 자리에서 조금 비켜서기도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고 나자 새로 온 B3들이 오래된 에이에프들에게서 일부러 떨어져 선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해졌다. 손님들이 왔을 때 자기들이 다른 그룹에속한다는 걸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에이에프가, 그것도 매니저가 엄선한 에이에프가 이런식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오래된 에이에프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보니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오래된 에이에프들은 자기들이 애써 무언가를 설명해 주려 할 때 B3들이 서로 슬쩍 눈짓과 신호를주고받는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로운 B3 시리즈는 여러 가지 점이 개선되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에이에프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있을까? 로사가 곁에 있었다면 내가 본 것을 로사에게 이야기했겠지만, 그때 로사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 P60

"그래?" 잠시 또 침묵이 흐르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야. 우리 딸이 걷는 모습에서 어떤 걸 알아차렸니?"
"왼쪽 고관절이 조금 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오른쪽 어깨도 통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어서 급작스럽게 움직여 불필요한 충격을 가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걷습니
다."
어머니는 곰곰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래, 클라라. 아주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조시의 걸음걸이를그대로 따라 해 볼 수 있겠어? 해 줄 수 있겠니? 지금? 우리 딸이 걷는 것처럼?"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매니저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매니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보일 듯 말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조시뿐 아니라 에이에프들까지 모두 집중해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아치문을 지나 바닥 위에 뻗은 해의 무늬 위로 발을 디뎠다. 그러고는 중앙부에 있는 B3들과 유리 진열대 방향을 향해 걸었다. 나는 내가 본 조시의 걸음걸이를 최대한 되살리려고 애를 썼다. 처음에, 내가 로사와 창가에 있을 때 택시에서 내려 걸어오던 모습, 그리고 나흘 뒤에 어머니가 어깨에서 손을 뗐을 때 창문으로 다가오던 모습, 그리고 방금 안도감과 행복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향해 서둘러 걸어오던 모습유리 진열대에 다다라 나는 그 주위로 돌았다. 진열대 옆에 서 있는 소년 B3에게 부딪히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도 조시 걸음걸이의 특징을 잃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그러나 방향을 돌려 돌아오면서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표정의 무언가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계속 나를 찬찬히 보고있었지만 시선의 초점이 내가 아니라 내 뒤쪽 어딘가에 맞춰져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마치 유리창이고 그 너머 멀리무언가를 보듯이. 나는 유리 진열대 옆에 한쪽 발꿈치를 뗀채로 멈춰 섰고 가게 안에는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매니저가 말했다.
"보셨다시피 클라라는 관찰력이 아주 뛰어나요. 이런 아이는 본 적이 없어요."
"엄마" 조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발, 엄마."
"좋아. 이 애로 할게요."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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