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라가 발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몇 발짝 뒤에 있던 오스카도 걸음을 멈춘다. 와이라의 머리 위에 청설모 한 마리가나타났다.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빠른 청설모. 털색은 안전 고깔과 비슷하고, 꼬리는 지난주에 미용실에 갔다 온 듯 풍성하다. 대나무 줄기에 앉아 갈색 열매를 앞발로 꼭 붙들고 있다. 청설모도 와이라의 존재를 감지했다. 나에게도 보일 만큼 깜짝 놀란 모양새다.
철저한 공포, 일말의 희망. 꼼짝 않는다면, 정말로 꼼짝 않는다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란 희망. 하지만 와이라의 꼬리 끝은 집고양이처럼 돌연 홱 움직인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 반짝이는 물고기 장난감이나 깃털 혹은 양말, 아니면 그 어떤 것이라도 끝장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나는 힘없이 청설모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해 원한다. 뛰어! 와이라의 입에서 군침이 뚝뚝 떨어진다. 그의 얼굴이 위쪽을 향한 탓에, 어둠 속에 사는 짐승처럼 눈이 더 큼지막해 보인다. 눈앞의 사건을 전부 담아낼 작정으로 눈이 점점 더커진다. 케이지에 있던 와이라는 작아 보이기만 했던 게 아니었다.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는 게 맞다. 밖에서 보니, 그는 자신이 채워야했던 공간을 이제야 채운다는 듯 부풀어 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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