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남김없이 이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앞길을 가로질러서, 혹은 내 피부 위에서 헤엄치고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기어다니는 동안, 밤중에 내게 살며시다가오거나 한낮에 나와 얼마간 나란히 동행하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들의 이름이 나와 그들 사이에 뚜렷한 장벽처럼 가로놓였을 때보다 그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너무도 가까워서 그들을 향한 나의 두려움과 나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이 하나의 두려움이 되었다. 비늘과 피부와 깃털과 털을 서로 만지고 문지르고 쓰다듬고, 서로 피와 살을 맛보고, 서로 몸을 녹이길 바라는 욕구, 많은 이들이 느꼈던 그 끌림은이제 두려움과 함께 모두 하나였다. 누가 사냥꾼이고 사냥감인지, 누가 포식자고 먹잇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슐러 K. 르 귄, <이름을 거부한 여자 She Unnames Them>

지금은 2007년, 내 나이는 스물넷. 조그맣진 않지만 크지도 않은 체구. 170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비뚤어진 코. 가슴 무게 때문에 허리가 쑤시고 발목이 약해 발걸음이 늘어진다. 나는 방황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는 일생을 거의 홀로 지냈다. 불안할 때면 뭔가를 먹고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자주 불안에 빠진다. 엄마와 아빠는두 분 다 심리학자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 나는 영국에서 태어나미술사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원숭이도 사람처럼 농담을 던지거나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사람이다. 퓨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링가, 아키(아가씨, 여기예요)!"
곧 부서질 듯한 버스에 앉아 덜컹거리며 나아가던 참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섯 시간쯤? 금이 간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소매로 문지르고 기다란 자국 사이로 밖을 내다본다. 온통 정글뿐이다.
"¿엔 세리오 (여기라고요)?" 목소리에 두려움이 배어 나온다. - P19

와이라는 그늘과 색이 비슷해서 언뜻 봐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허공을 가르는 긴 꼬리는 단번에 알아보겠다.
"올라, 와이라." 나는 소리를 낮춘다.
뚜렷한 것이라곤 와이라의 두 눈뿐이다. 그의 눈은 카누 노잎이 달린 식물의 꼭대기처럼 초록색이다. 코는 노을의 끝자락처럼 분홍빛이 감돈다. 와이라가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침묵의 순간. 그 순간이 너무 길어서 아예 움직이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차에 와이라가 단 꼭대기로 펄쩍 뛰어올라 마치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는 듯 우아하게 착지한다. 나는 경외감에 뒤로 물러난다.
와이라가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나는 주눅이들어 가만히 바라본다. 그때 제인이 철조망 안으로 살며시 두 손을밀어 넣는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나는 또다시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반경 80킬로미터 내에는 의사도 없다고! 정글을 뚫고 캠프로 돌아가서 수의사가 제인의 살갗을 꿰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모든 장면이 와이라가 케이지를 가로지르는 찰나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철조망으로 다가온 와이라가 무언가를 핥기 시작한다. 제인의 손을 핥고 있다. 제인의 표정은 마치 다른 세계로 가 있는 것 같다. 소매를 걷어올리자 퓨마가 제인의 손에 머리를 들이민다.
이제야 제인이 무얼 하려 했는지 알겠다. 나는 퓨마를 마운틴라이언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른 이름들도 머릿속 깊은 곳에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쿠거, 팬서……. 더는 모르겠다. 이 모든 이름이 같은 동물을 가리키는 것인지 전혀 몰랐다. 이 깨달음을 큰소리로 말해볼까 했지만 이내 그러지 않기로 한다. 할짝대는 소리만 들려온다. 깔깔한 사포로 문대는 듯 거친 소리.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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