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이나 가족들이나, 지난 2년 반 동안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겠어." "그럼요. 주식시장이 폭락하기 시작할 때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어요. 우리가 파산한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죠.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우리가•••••.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마지막 순간에 결국은 회복하리라고만 믿었죠. 그런데 정말 모든 게 무너졌을 때, 더 이상 살아갈 의미도 없다고 느껴졌어요. 정말이지, 미래고 뭐고 암담하기만 했어요. 한 2주 동안은 처참한 기분에 빠져 있었죠. 모든 걸 잃어버리고, 더 이상 사는 낙도 없을 것만 같고, 좋아하던 모든 것들과 헤어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 2주쯤지나고 나니 결국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래, 다 잊어버리자. 과거에 대한 미련 같은 것, 다시는 떠올리지 말자.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했어요. 지금도 미련은 없어요. 가졌을 때 충분히 즐겼고, 이젠 없으니 그뿐이고, 그렇게 생각해요." - P233
"스스로 소유욕이 강한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있나? 그레이가 깊은 시인의 감성을 갖고 있다고도 했고, 잠자리에서 아주 열정적인 연인이라고도 했어. 그렇다면 두 가지 모두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잖아. 하지만 네가 말 안 한 게 있어. 그 두가지를 합한 것보다 네게 훨씬 더 중요한 무엇. 그건 바로, 그리 작진 않지만 아름다운 너의 그 두 손 오목한 곳에 그를 붙잡아 두고 있다는 느낌이지. 래리였다면 언제든 거기서 빠져나 - P275
키츠의 시 기억하나? ‘사랑에 빠진 용감한 연인이여, 당신은 결코 입 맞출 수 없으리라.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기만할뿐." "가끔 보면 선생님은 스스로 아주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다소 신랄한 말투로 대화를 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잡아 두는 방법은 한 가지에요. 그게 뭔지는 선생님도 아시죠? 한 가지 더 알려 드릴까요? 중요한 건 남녀가 처음 잠자리를 가질 때가 아니에요. 두 번째가 중요한 거라구요. 두 번째 잠자리에서 남자를 잡아 둘 수 있으면 그를 영원히 잡아 둘 수 있는 거죠." - P276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야. 그래서 명예를 희생시켜도 좋고 치욕도 그리 큰 대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넬과 키티 오셰이도 결국 열정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말았잖아. 그리고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한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 - P280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샤르트르에 갔다가 파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레이가 운전을 하고 래리는 조수석에, 이사벨과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긴 하루를 보낸 터라 모두들 지친 상태였다. 래리는 조수석 등받이 위쪽으로 팔을 뻗어 걸쳐놓았는데, 그 자세 때문에 셔츠 소매가 올라가면서 가늘지만 강인한 팔목과 팔뚝이 드러났다. 팔뚝을 가볍게 뒤덮은 솜털 위로 햇살이 쏟아져 황금빛으로 빛났다. 순간 나는 이사벨의 몸이 경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흘끗보았다. 그녀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호흡이 빨라지면서 두 눈은 금빛 솜털로 뒤덮인 강인한 손목에 고정되었다. 그의 손가락은 길고 섬세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강렬한 욕정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색욕의 가면 같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토록 방자하고 음탕한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음탕한 표정 때문에 섬뜩하고 무섭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교미 중인 암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듯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래리의 손뿐이었다. 무심하게 등받이를 감싼 그 손이 그녀를 광란의 욕정으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마치 경련이 인 듯 그녀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두 눈을 감고 구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말했다. "담배 한 대만 주세요." 귀에 거슬리는 거친 목소리가 도무지 그녀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케이스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어 그녀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굶주린 듯이 깊이 빨아들였다. 그 이후로 도할 때까지 창밖을 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P313
"남편과 아기가 죽었을 때 소피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채 술과 난잡한 성교라는 끔찍한 타락으로 스스로를 내몬 거지. 자신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한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야 천국 같은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잃게 되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해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거야. 더 이상 신들이 마시는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는 얘기지." "그런 건 선생님 소설에나 나올 만한 얘기잖아요. 말도 안된다는 거 선생님도 아시죠? 소피가 술독에 빠진 건 술을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여자가 어디 한두 명이에요? 그 애가 타락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선에서 갑자기 악이 ‘툭‘ 튀어나올 수는 없죠. 악은 예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걸 잘 막아 두고 있다가 차 사고로 그 방어막이 깨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나온 것뿐이에요. 쓸데없이 소피를 동정하지 마세요 소피는 원래 그런 애였어요" - P328
"정말 너무하시네요. 제가 래리를 남자나 밝히는 막돼먹은여자한테 넘겨주려고 모든 걸 포기한 줄 아세요?" "왜 네가 모든 걸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단지 래리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놓아줬으니까요." "거짓말은 그만두라구, 이사벨. 네가 래리를 포기한 건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때문이었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빵과 버터가 담긴 접시가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접시를 잡았다. 바닥에 빵과 버터가 흩어졌다. 나는 일어나서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 크라운더비 접시가 깨졌으면 네 엘리엇 외삼촌께서 아주 고마워하셨을걸. 도싯 공작 3세를 위해 만들어진 거라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거니까."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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