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에 군인들과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많이와 있었어. 묘지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십자가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엄숙하고 슬픈 분위기 속에서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여자들도 남자들도 눈물을 흘렸지. 그런데 난 말이지. 그때 이상하게도 그 작은 십자가들 아래 누워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우리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런 기분을 느꼈다고 친구한테 말했더니 대체 무슨 소리냐고 갸우뚱거리더군. 하지만 나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어. 친구는 나를 무슨 정신병자처럼 취급했지.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전투가 끝난 뒤에 프랑스 병사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 그런데 마치 극단이 망한 후라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져서 먼지 가득한 구석에 쌓여 있는 꼭두각시 인형들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래리가 너한테 했다는 그 말 있지, 죽은 사람은 정말로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그때 나도 그런 느낌이었어." - P89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당신에게 알려 줄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그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어. 바로 홀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때의 기분이지. 높디높은 저 위에서, 사방이 온통 무한한 공간뿐인 곳에서 날고 있을 때 말이야. 그럼 끝없는 공간에 취하게 돼. 그때느끼는 흥분이란, 세상 그 어떤 권력과 영예를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지. 얼마 전에 데카르트를 읽었어. 그 평온함, 품격, 명석함이란!" 그때 이사벨이 한사코 말해야겠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래리, 그거 알아? 당신은 나한테 맞지도 않는 삶을요구하고 있어. 내가 관심도 없고, 또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은삶 말이야. 난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라구. 몇 번이나 말해야알겠어? 난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 10년 후면 늙어 버릴 거고,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삶을 즐기고 싶어. 아, 래리, 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삶은 시시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제발 부탁이니, 당신 자신을 위해서 포기해. 래리, 당신은 남자니까 남자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있다구.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헛된 꿈 때문에 나를 포기하진 않겠지. 이미 해 보고 싶은 만큼 했잖아. 이제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자." "안 돼, 그럴 수 없어, 이사벨. 그건 내게 죽음과도 같아. 내영혼에 대한 배신이야." - P125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아냐, 당신을 사랑해. 때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일을 하려면 주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게 되나 봐." 그녀는 반지가 놓인 손을 래리에게 내밀며 떨리는 입술로애써 미소를 지었다. "받아, 래리." "내가 갖고 있어 봐야 뭘 하겠어. 우리 우정에 대한 추억으로 간직해 줄래?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으면 되잖아. 우정까지끝나는 건 아니겠지?" ‘래리 난 언제까지고 당신을 좋아할 거야." "그럼 갖고 있어. 그래 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반지를 오른쪽 손가락에 다시 꼈다. "너무 큰데." "작게 줄이면 되지. 이사벨, 우리 리츠의 바에 가서 한잔하자" "좋아"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끝나 버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이제 래리와 결혼하지 않을것이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을,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격렬한 장면조차 연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약간은 원망스러웠다. 마치 집을 빌리는 일을 의논하는 사람들처럼, 너무나도 침착하게 이야기를 끝냈다. 가슴이 무너졌지만, 한편으로는 둘 다 점잖게 행동했다는 사실에 희미한 안도감도 느껴졌다. 래리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싶었지만, 그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매끄러운 얼굴과 검은 눈동자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그녀조차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일종의 가면이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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