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어젯밤에 집에 없었던 게아닐까. 그런 의심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남편의 판단과 말이 틀렸던 적은 별로 없다.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건 내가추측하고 내린 잘못된 판단들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믿으면안 된다.
‘나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다‘
객관적인 사실을 보고 판단해야만 했다. 거실과 마당에 설치한 CCTV 영상을 보고 명확한 판단을 해야 했다. 분명, 남편은 자기 말대로 거실을 서성이다 침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홈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확인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이전까지 녹화된 영상은 삭제돼 있었다. 나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다. 내가 의논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근데 남편을 믿어도 될까?
어둠의 방에 혼자 갇힌 듯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 P68

어린시절 살던, 항만 근처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가난했다. 우리집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화장실이 딸린집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잘사는 아이라는 이야기를듣곤 했었다. 다 무너져가는 아파트라도,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부러워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언제나 나에게 먼저다가왔고, 나는 다가오는 아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국민학교 및 학년 때였을까? 나에게 유독 친근함을 표시하며 매일같이 선물을 주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자기 집에 초대해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놀러갔다. 친구네 집은 한참이나 흙길을 올라가서야 나오는 판잣집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나는 소변이 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구더기가 가득한 푸세식 공동 화장실을 쓰긴 싫었다. 친구는 부엌으로 쓰는 공간의 수챗구멍에 쭈그리고 앉아서 소변을 봤다. 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 앉아서 소변을 누라고 했다. 얇은 창호지 문을 사이에 두고 부역과 연결되어 있는 방에는 친구의 아픈 할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뛰쳐나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소변이 너무 마려워 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가 보여준 가난이 두려워서였던 것 같다. 나는 그날이후로 학교에서 마주친 그 친구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않았다.
그후 내가 좀더 중심가에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로, 그리고 서울 중심에 위치한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깨달은 건 나역시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친구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누군가 나를 바라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안에서 점점 자라났다. - P201

"징그럽죠? 멀리서 봤을 때는 예뻤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안에 빼곡히 든 수술도 소름 끼치고, 악마가 입을 벌리고 있는것처럼......."
나도 일어나 주란 옆에 서서 창 너머의 화단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란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얼마 전남편을 죽이기 위해 주스에 수면제를 타고 저수지를 향하던 내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란의 눈이 공허하게 화단을 주시했다. 나는 그런 주란의 눈빛에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여자도 지금 못 할 짓이 없겠구나. - P338

망상이다. 그걸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남편과 수민의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집에서 도망쳤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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