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어 갔고, 눈이 장밋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크리스털처럼 맑은 눈의 표면에 갑자기 미풍이 일면서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울리히는 목소리를 울리게 하여 길고 날카롭게 아리 영감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산들이 잠들어 있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으로 날아올랐다. 새 우는 소리가 파도치는 바다 위로 퍼져 나가듯, 그의 목소리는 꽁꽁 언 거품 같고 끄떡도 하지 않는 두터운 눈밭 위로 멀리 퍼져 나갔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지만 화답하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 P660

오를라
Le Horla

1판
저명하고 탁월한 정신과 의사인 마랑드 박사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동료 셋과 학자 넷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정신병원에 와서 환자 하나를한 시간 정도 봐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이 모두 모이자 박사는 말했다.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가장 기묘하고 염려스러운 환자를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환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환자가 직접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박사가 초인종을 누르자 하인이 남자 한 명을 들여보냈다. 환자는 무척 야위어 시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온갖 공상에 시달리는 몇몇 광인들이 바싹 야위었듯이, 병적인 생각은 열병이나 폐병보다 인간의 살을 더 많이 먹어 치우는 법이다.
그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 P672

구멍
Le Trou

폭행 및 과실치사, 실내장식업자 레오폴드 르나르 씨를 중죄재판소에출두시킨 기소 내용은 이러했다.
그의 주변에는 사건의 주요 증인들, 즉 희생자의 미망인인 플라메슈부인과 가구점 직공 루이 라뒤로, 그리고 배관공 장 뒤르당이 배석해있었다.
피고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그의 아내가 있었다.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부인복을 입은 긴꼬리원숭이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르나르(레오폴드)는 그 비극이 일어난 정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P686

클로셰트
Clochette

오래된 이상한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도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 오래된 기억이라서 어떻게 그리도 생생하고 끈질기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슬프거나 감동적이거나 끔찍한 일들을 이후로도 수없이 목격했지만, 옛날에, 너무나 오래전에, 내가 열살에서 열두 살이었을 때 보았던 클로셰트 아주머니의 얼굴을 눈앞에떠올리지 않고는 단 하루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한다.
클로셰트 아주머니는 옷가지를 수선하러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마다 우리 집에 오던 나이 든 수선사다. 당시 내 부모님은 성城이라고 불리는 시골 별장에 살고 계셨는데, 사실 그 별장은 지붕이 뾰족한 오래된 집이었고 주위의 농장 네다섯 곳이 그 별장에 속해 있었다. - P697

당번병
L‘Ordonnance

장교들이 가득한 묘지는 마치 꽃이 핀 들판 같았다. 하얗고 검은 십자가들이 죽은 사람들 위에 쇠, 대리석 혹은 나무로 된 팔을 비통하게 벌리고 있었고, 그 무덤들 사이로 군모와 빨간 반바지, 계급장과 금단추, 검, 참모부의 견장, 병사와 경기병의 단춧구멍 장식 끈들이 지나갔다.
방금 리무쟁 대령의 아내를 매장한 참이었다. 그녀는 이틀 전 미역을감다가 익사했다.
다 끝났다. 사제도 떠났다. 하지만 대령은 장교 두 명에게 부축을 받으며, 이미 부패가 시작된 젊은 아내의 시체가 담긴 나무관이 보이는 구멍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 P705

초상화
Un portrait

"야, 밀리알이네!" 내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가리키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돈 후안 같은 사나이를 알고 싶은 마음이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젊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흐린 잿빛이어서, 북쪽 지방 사람들이 쓰는 털모자와 조금 비슷했다. 가늘고 긴 턱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어서 짐승의 모피처럼 보였다. 그는 웬 여자에게 몸을 기울인 채 경의와 호의가 가득한 온화한 눈길로 그 여자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P711

파리
Mouche

어느 뱃놀이꾼의 추억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뱃놀이하면서 지내던 시절에 나는 별난 일과 별난 여자들을 많이 보았어요. 내 나이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의 일이지요. 그때 경험한 억지스럽고 태평한 삶, 즐겁지만 가련한 삶, 활기차고 떠들썩한 삶을 ‘센강에서‘라는 제목의 책으로 쓰고 싶은 욕구를 얼마나 여러 번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때 나는 가난뱅이 사무원이었어요. 지금은 순간의 변덕을 위해 엄청난 돈을 써버릴 수 있는 성공한 남자지만 말입니다. 당시 내 마음속에는 상상에서 튀어나와 온갖 기대를 하게 만들고 내 존재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대수롭지 않지만 실현될 수 없는 수많은 욕망들이 들끓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 욕망이 찾아와도 내가 졸고 있는 안락의자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기 힘들 겁니다.  - P718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가능한 밑그림 같은 여자, 소묘화가가 저녁 식사를 한 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카페 냅킨 위에선 몇 개로 간략하게 그린 캐리커처 같은 여자였어요. 자연은 이따금그런 존재를 만들어 내지요. - P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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