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떠나기 전 이미 학생들에게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삼촌>(1978)을 권해둔 터였는데, 4.3의 진실을 용기 있게 공론화한 이 기념비적인 소설을, 나도 제주의 버스 안에서 오랜만에 재독했다. 이 소설에서 ‘짓‘이라는 단어에 새삼 눈길이 머문것은 기행을 떠나기 직전 강의에서 마침 이청준의 <소문의 벽>(1971)을 토론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던 이들이 눈앞에 들이밀었다는 그 불에 대해 말해주는 또 한 편의 소설. 현기영의 제주에서 자행된 전짓불의 만행은 전쟁 발발 이후 이청준의 장흥에서도 행해졌던 것이어서, 이에 대해서라면 <소문의 벽> 쪽이 더 자세하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어머니더러 당신은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 사람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지독한 복수를 당할 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상대방이 어느 쪽인지 정체를 모른 채 대답을 해야 할 사정이었다. 어머니의입장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버린 전짓불에 대한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소문의 벽》, 문학과지성사2011,219쪽)

이 전짓불이 끔찍한 것은 50퍼센트의 확률로 오답을 말했을경우에 가해질 폭력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폭력은 답안 채점 이후에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짓불을 들이미는 순간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질문은 진실을 말하라고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로 인간개개인의 진실이라는 것은 도무지 한두 마디로 말해질 수 없는것일 때가 많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실은, 이렇게 시작되는 긴 이야기의 끝에서야 겨우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전깃불을 들고 있는 이들은 그 이야기를 다 들을생각이 없었으리라.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 P91

그래도 한 번 더 물었다. "그렇다고 학대받은 아이들은 아프고 슬프니까 따뜻하게 위로해줘야 한다는 내용의 노래만 불러야만 할까? 그것이 본의 아니게 그 아이들을 앞으로도 계속 아프고 슬픈 존재로 머무르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똑같은 시선으로만 보지 말고 다른 모습을 발견해주는 일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제의 흥미로운 이중성을 노래한 아이유가 그랬듯이." 그러자 그 학생은 고요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받은 아이들의 특징이에요." 이 말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와 동시에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학대받은 아이들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고, 그 학생은 안다는 것. - P96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
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 P115

어딘가에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線)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삶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단편소설이란 이런것이다. 그런데 제임스 설터는 더 지독해서,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고요하고 우아한 몇 페이지를 써나가다가, 갑자기, ‘돌이킬 수 있음‘이 ‘돌이킬 수 없음‘으로 전환되는 그 극적인 순간으로 독자를 데려가 발견과 파열을 동시에 목격하게 한다. 그리고 소설의 끝에는 ‘어젯밤‘에 생긴 일 덕분에 이제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 인물들이 망연한 표정으로 독자를 바라본다. 그것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짓는 표이다. 나도 당신도 그런 시간 속에 정지 화면처럼 서 있었던이 있을 것이다. - P117

 그중 하나인 17살 소년 레오(작가에게 수용소 체험을 증언하고 작고한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를 모델로 한)의 눈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견딜 수 없는 참혹을 견뎌내야 했다. 그래서 이 소년은 살인적인 배고픔을 ‘배고픈천사‘와 친구가 된 것으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착란 상태를 가슴속의 ‘숨그네‘가 뛰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작가의 말대로 비극이시의 옷을 입었다. 한 대목만 옮긴다.

점호 시간에는 부동자세로 서서 나를 잊는 연습을 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크지 않아야 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눈만 치켜떴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내 뼈를 걸어둘 만한 구름자락을 찾았다. 나를 잊고 하늘의 옷걸이를 찾으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구름이 없는 날도 잦았다. 그런 날 하늘은 탁 트인 물처럼 푸르기만 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빈틈없이 뒤덮는 날도 잦았다.
구름이 계속 흘러 옷걸이가 멈춰 있지 않은 날도 잦았다.
추위가 내장을 찌르는 날도 잦았다.
그런 날은 하늘이 내 흰자위를 뒤집었고 점호는 그걸 다시 뒤집었다. 걸릴 곳이 없는 뼈들은 오로지 나한테만 걸렸다.(30~31쪽)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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