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여자 후배와 함께 놀러 왔기에 김치며 반찬을이것저것 싸주었다. 나 잘해 묵고 살아야 하면서도 A는 내가 싸주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 갔다.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새 통을 여러 개 들고 왔다.
"이 사람 저 사람 싸줄라먼 통 겁나 필요허제?"
장애인 연금 받아 산다는 A가 포장도 뜯지 않은 새통꾸러미를 내밀었다. A는 그렇게 똑떨어지게 깔끔한 아이였다. 깔끔한 A는 노상 오고 싶다면서 오지는 않는다. 언젠가 전화를 해서 보고 싶다기에 오라 했다.
"아따, 니는야, 멋을 참 모린다이. 남자 혼자서 워치케갈 것이냐?"
"왜? 나는 가시내 아니람서?"
"와따메. 참말로 암것도 모리네이. 그럼시로 소설은 워찌 쓰까?"
긍게. 그러니까 별 볼 일 없는 작가지.
나는 아직도 말하지 않은, 혹은 돌려 말한 A의 말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여자로 보일까 봐 젊은 저의 혈기를 가라앉히려는 말이었다는 건가, 어리석은 나는 그리 짐작할뿐이다. 그런들 저런들 무슨 상관이랴. 환갑 앞두고.
나는 아직도 A가 겪고 있는 불행의 긴 터널을 A처럼 담담하게 직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A와 술 마시는 게 즐겁지 않다. 가슴이 먹먹하고, 알 수 없는 무엇엔가 화가 치민다. 그 여름밤, A가 직접 만든 밤나무 위 오두막에서의 그하룻밤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때의 싱그럽던, 똑똑하던, 깔끔하던, 능청스럽던 스물두엇의 A도 눈물겹게 그립다. - P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