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을 출판한 사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적표현물 제작만이었으면 굳이 도망 다니지 않았을것이다. 그 전에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이라는 조직의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기자로 2년 정도 일했는데, 그 조직이 반국가단체로 몰려 전 조직원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함께 일하던 친구 대부분이 붙잡혀 7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P11

"웜마야!"
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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