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이 유대 민족에 대한 범죄는 무엇보다도 인류에 대한 범죄이며 국제 재판소에 대한 타당한 주장이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이히만이 재판받고 있는 법과 심각한 모순을 이룬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수를 포기해야 한다고 제안한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1950년의 나치스 및 나치 부역자 (처벌)법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는 모순되며,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주장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살인자가 처벌되는 이유는 그가 공동체의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지 그가 스미스 집안에서 그 남편이자 아빠이며 생계를 위해 일하는 자를 빼앗았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국가가고용한 근대의 대량 살인자들이 재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류의 질서를 위반했기 때문이지 그들이 수백만 명을 죽였기 때문은 아니다. 살인이라는 범죄와 대량학살이라는 범죄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따라서 후자가 "적절히 말하면 새로운 범죄가 아니다"는 일반적인착각보다도 이러한 새로운 범죄에 대한 이해에서 더 위험한 것은, 또는 이러한 새로운 범죄를 다룰 수 있는 국제형사법의 출현에 더욱 방해가 되는 것은 없다. 대량학살이라는 범죄의 핵심은 전적으로 다른 질서가 붕괴되고 또 전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 P373

 일단 한번 등장하여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행위는 그러한 발생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하나의 가능성으로 인류에게 남는 것은 인간적 사건들의 본질 속에 놓여 있다. 어떠한 처벌도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는 충분한 억지력을 가진적이 없었다. 반대로 일단 어떤 특정한 범죄가 처음으로 발생한다면 처벌이 무엇이든 간에 그 범죄의 재출현은 그의 최초의 출현보다도 훨씬가능성이 높다. 나치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재발할 가능성에 대해말하는 특정한 이유들은 훨씬 더 그럴듯하다. 근대의 인구 폭발과 기술적 장치들의 발견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두려운 사실, 게다가 기술적 장치들은 자동화를 통하여 심지어 노동을 보더라도 그 인구의 많은 부분을 ‘잉여‘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또 핵에너지를 통하여 마치 히틀러의가스 시설을 사악한 아이들의 서투른 장난감처럼 보이게 만드는 도구들을 사용해서 이러한 이중적 위협을 처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점은 우리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바로 그 같은 이유에서 전례 없는 일이 일단 발생했다면 그것은 미래에 선례가 될 것이고,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해 다루는 모든 재판은 오늘날 아직 ‘이상‘인 기준에 따라 판단되어야만 한다.  - P375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법률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보면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잔혹한 일들을 모두 모아놓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뉘른베르크에서 피고와 그의 변호사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처럼) 사실상 인류의 적인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거나느끼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히만 재판에서 나온 증거는 주요 전법들에 대한재판에서 제시된 증거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 자신은 분명한 양심을 갖고 있었다는 항변은 보다 쉽게 기각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항변은 ‘상관의 명령‘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논지와, 간헐적인 불복종에 대한 여러 형태의 자부심이 결합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록 피고의 나쁜 신념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해도, 죄를 느끼는 양심이 실제로 입증되는 유일한 근거는 나치스, 특히 아이히만이 속한 범죄 조직들이 전쟁 끝나기 전 몇 달 동안 그들의 범죄의 증거들을 그토록 아주 열심히 파괴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근거는 다소 위태롭다. 대량학살의 법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다른 나라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인정만을 그것은 입증할 뿐이었다. 혹은 나치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인류를 ‘하류 인간들의 지배‘로부터, 특히 시온의 장로들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싸움에서 패했다는 것이다. 또는 일상적인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패배에 대한 인정을 입증할 뿐이었다. 만일 그들이 승리했다면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가 죄책감에 물든 양심으로 고통을 받았겠는가?
아이히만 재판에서 논란이 된 보다 큰 문제들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것은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모든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이었다. 문명화된 사법권이 이처럼 주관적 요소에 대한 고려를 하는 것보다 더 자부심을 가진 것은 없었다. 이러한 의도가 결여된 곳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심지어 도덕적 불건전성의 이유에서라 하더라도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손상된곳에서는, 우리는 어떤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 P379

운 좋게도 우리는 그만큼 멀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피고 자신은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주된 정치적 목적이 된 국가에서 산 모든 사람의 편에 서서 그 죄가 현실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잠재적으로만 유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내적이고 외적인 어떠한 우연적 상황을 통해 피고가 범죄인이 되는 길로 내몰렸는지 간에, 피고가 행한 일의 현실성과 다른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잠재성 사이에는 협곡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피고가 한 일에만 관여할 뿐, 피고의 내적 삶과 피고의 동기에서 가능한 비범죄적본성 또는 피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범죄 가능성에는 관여하지않습니다. 피고는 피고의 이야기를 불운에 찬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만일 상황이 보다 유리했더라면 피고는 우리 앞이나 또는 다른 형사재판소로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는 점도 당신에게 인정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 P382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경찰심문을 담당한 독일계 유대인과 마주앉아 자신의 마음을 그 사람 앞에 쏟아 부으며 어떻게 자기가 친위대의 중령의 지위밖에 오르지 못했고 또 자기가 진급하지 못한 것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또다시 설명을 하면서 4개월 동안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상상력이 결여 때문이었다. 원칙적으로 그는 이 모든 일의 의미에 대해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법정에서 있었던 최후 진술에서 그는 "(나치] 정부가 처방한 가치의 재평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있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 P39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집단적 죄나 집단적 무죄 같은 것은 없다는 점에, 그리고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어느 한 개인은 유적이거나 무죄일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집단의 개별 구성원이 한 일과는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는 정치적 책임과 같은 것이 있어서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될 수도 또 형사재판에 세울 수도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부는 그의 선임 정부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으며,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와 과실에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 나폴레옹이 혁명을 통해 프랑스에서 정권을 장악한 뒤에, 자기는 생 루이에서 공공안전위원회에 이르기까지프랑스가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진다고 말했을 때, 그는 모든 정치적 생명의 기본적 사실들 가운데 하나를 다소 강조하여 서술했을 뿐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세대가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탄생함에 따라 선조들의 행위에 의해 축복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조들의 죄에 의해서도 짐을 지게 되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그런데 이런 종류의 책임은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은유적 의미에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 또는 자기의 민족이 한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말해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에 대해서 죄가 있다면 그가 모든 죄에 대해서 자유롭게 느낀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어떤 일을 하지도 않고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느 날 국가들 사이의 어떤 정치적 책임들이 국제 재판소에서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아주 상상 가능한 일이다. 상상이 가능하지 않은 일은 그러한 법정이 개인의 유죄와 무죄를 선언하는 형사재판소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개인적 유죄와 무죄에 대한 질문, 피고와 희생자 모두에게 정의를 부여하는 행위는 형사재판소에서 문제가 되는 유일한 일이다. 아이히만 재판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이곳의 법정이 법전에서 발견되지않는 범죄, 그와 유사한 것이 적어도 뉘른베르크 재판 이전에는 어느 법정에서도 알려진 적이 없었던 범죄를 직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보고서는 예루살렘 법정이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어느정도 성공했는가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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