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식으로 오후를 보낸 뒤, 도서관 유리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저녁이었다. 5월의 푸른 밤이 교정 위로 드리워졌다. 도시의 붉은 불빛에 검게 기대 선 저녁 산 이마 위로 별빛이 반짝였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 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노랫소리 크게 울려 퍼졌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안에 가득한데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저도 모르게 나는 그 노래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노래는 계속됐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무슨일인지 학교 가운데 있던 금잔디 광장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작은 사내 하나가 통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며 서 있었다. 그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본 김광석이었다. 그날, 나는 김광석의 그 노래와 완벽하게 소통했다. 그 느낌은 죽어도 잊지 못할 느낌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그날,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들려오던 노랫소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예술이란 결국 마음이 통하는게 아니라 몸이 통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던 그때의 일들이 어제인 듯 또렷하다. - P144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정약용의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게 있다.
어느새 가을 멀리 가버렸으나
숲나무엔 가을 뜻 아직 남았네
적막한 바위 틈엔 물기 마르고
맑은시내 어귀에 뗏목 깔렸다
나무꾼은 상수리 밤톨 줍고
스님은 우물에서 무를 씻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엔 초승달 벌써 올라와
翛然秋遠逝 木林有餘情 斷溜雲根靜 横槎澗口清
野樵收橡果 儈井洗蕪菁 未了斜陽色 藤梢月已生
어느새 청춘은 멀리 가버렸으나 내 마음엔 여전히 그 뜻 남아 있는 듯, 지금도 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 몸이 아파온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에 벌써 올라선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 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