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이 5명 가운데 1명꼴로 살아남은 나라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민감하고 또 거북스럽게 된 것은 피고에 대해서가 아니라 배경 증인들에 대해서였다. 하우스너 씨는 ‘비극적 다수의 희생자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들은 이처럼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이들 각각은 법정에서 시간을보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판사들은 ‘일반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또는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검사와 논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일단 증인이 증언대에서자 증언 사이에 끼어들어 짧게 끝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란다우 판사가 말한 것처럼, "증인의 명예와 그가 말하려는 사안 때문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 ‘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말해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이외에도 다른 난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등장하기 전에 유죄임이 어떠한 합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임이 확정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감히 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납치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왜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 법에 대한 형식상의 위반‘을 범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 P297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항목은 학살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아이히만의 책임문제였다. 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학살수용소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다고 한다. 이 문제들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을모두 파기한 사실은 판사들의 고도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웅변적으로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그 상황 전체에 대해 그들이진정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수용소에는 두 범주의 유대인이 있었다는 점에서 시작했다. 하나는 이른바 ‘수송된 유대인‘(Transportjuden)로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나치스의 눈으로 보기에도 한 차례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다른 범주는 ‘보호관리대상‘(Schutzhaftjuden)에 속하는 유대인들로 어떤 위반 사항 때문에 독일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이들은 정부가 ‘무고한 사람들을 완전한 공포 하에 두려고 하는 전체주의적 원칙 하에 있었지만, 제국 내부의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동부로 이송되는 와중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었다. (아우슈비츠에대한 훌륭한 증인인 라자 케이건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아우슈비츠의 커다란 패러독스였다. 범죄행위로 체포된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선택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대체로 살아남은 것이다.) 아이히만은 보호관리대상과는 무관했다. 그러나그가 전문적으로 처리한 수송된 유대인의 경우, 수용소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히 신체가 건강한 사람 25퍼센트를 제외하고는 규정상 죽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 제시된 방식에 따르면 그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아이히만은 이 희생자들의상당수가 죽을 운명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을 위한 선별작업은 현장에서 친위대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이송될 사람의 명단은 통상 자국에서 유대인위원회나 치안경찰에 의해 이루어졌고 결코 아이히만이나 그의 요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살게 되고 누가 죽게 되는가를 말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알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히만이 "저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죽이지 않았어요. •••••• 저는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과연 그 말이 거짓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특히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아마도 살해할 배짱조차도 갖지 못한) 대량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행위를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 P302
히틀러는 외국 국가를 정복한다는모든 관념을 거부한다는 점과, 그가 요구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이주를위한 동부의 ‘빈 공간‘ [volkloser Raum)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연설을들은 사람들(특히, 블롬베르크, 프리츄, 레더)은 그런 빈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동부에서의 독일 승리는 자동적으로 전체 원주민의 ‘소개‘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했을 것이다. 동부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반유대주의의 결과일 뿐아니라 포괄적인 인구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즉 종족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인들은 이미 유대인의 별 대신에 특별한 ‘P‘자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이미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듯이 파괴의 과정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경찰이 취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9월 회의 이후 이동학살대의 사령관들에게 보내진 속달 편지에는 재판에 제출된 특별한 관심을 끄는 문서들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점령지역의 유대인 문제‘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비밀을 지켜야만 할 ‘최종목표‘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그 문서는 철도 가까운 곳에 유대인을 수용하라고 분명히언급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최종 목표‘란 아마도 폴란드 유대인의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며, 이것은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새로운 내용은 제국에 새로이 합병된 지역에살고 있던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이것이 실로 독일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따라서 최종 해결책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과 관련된 한 이 문서들은 비록 이 단계에서도 아이히만은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보여준다. 여기서도 역시 그의 역할은 ‘이송‘과 ‘이주‘ 전문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 전문가가 필요 없었고, 어떤 특별한 지시들‘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특권적 범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위원회 요원들조차도 게토가 마침내 소개되었을 때 예외 없이 처리되었다. 예외는 없었다. 왜냐하면 노예 노동자들에 부여된 운명은 단지 다른 종류의 보다 느린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정적대량학살에서 그 역할이 아주 본질적이라고 생각되어 ‘유대인 장로회기구가 즉각적으로 설립하게 된 유대인 관료조직은 유대인을 체포하고수용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군대의 배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야만적 대량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군 사령관들은 민간인들의 대량학살에 저항한 것 같고, 또 하이드리히는 독일 고위 지휘관과 유대인, 폴란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완전한 ‘즉각적인 청소‘의 원칙을 수립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청소되어야 하는 작전의 규모 때문이 유대인이 먼저 게토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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