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민족을 파괴하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한 이러한 역할은 유대인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모든 어두운 이야기 가운데 가장 어두운장을 이룬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앞서 언급한 적이 있는 라울 힐베르크의 권위 있는 저술 『유럽 유대인의 파멸』(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에서, 이전에도 알려져 있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병적이고도 지저분한 세부사항까지 처음으로 노출된 것이다. 협조의 문제에서는 고도로 동화된 중부 및 서부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들과 이디시를 사용하는 동부의 대중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바르샤바처럼 암스테르담에서도, 부다페스트에서처럼 베를린에서도 사람들과 그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자신들의 추방과 학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추방자들로부터 돈을 인수하고, 소개된 아파트를 계산하고, 유대인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들을 기차에 태우도록 경찰력을 제공하며, 마침내 마지막 행동으로 유대인 공동체 자산의 최종 약탈을 위해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이르기까지 유대인 요원들은 신뢰를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노란색 별 표지를 분배했고, 때로는 바르샤바에서처럼 "완장 판매가 정규 사업이 되었다. 보통의 천 완장이 있었지만 세탁이 가능한 멋진 합성 소재 완장도 있었다."  - P188

 학살센터에서 실질적인 살인 작업이 유대인 부대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잘 알려진 사실은 검찰의 증인들에 의해 공정하고도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일을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금니를 뽑고 시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는지. 그들은 어떻게 무덤을 파고 또 대량학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 무덤을 덮어 없앴는지, 유대인 기술자들이 어떻게 테레지엔슈타트에서 가스실을 만들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테레지엔슈타트에서는 유대인의 ‘자율성‘은 심지어 유대인이 사형집행인이 될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이것은 끔찍하기는 했지만 도덕적 문제는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일꾼들을 선별하고 분류한 것은 친위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범죄적 요소에 대한 특별한 편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는 특히폴란드에서 그러했는데, 거기서는 나치스가 폴란드 지식인들과 전문직종사자들을 학살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많은 수의 유대인 지식인들을학살했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서부 유럽에서의 정책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거기서 나치스는 독일인 민간인 억류자나 전쟁 포로들과교환할 목적으로 저명한 유대인을 남겨놓는 경향이 있었다. 베르겐빌젠은 원래 ‘교환용 유대인‘을 위한 수용소였다.) 비록 최종 해결책이라는 상황 하에서라 하더라도, 유대인의 협조에 대한 아이히만의 다음과 같은 묘사 가운데 존재하는 진실 속에 도덕적 문제가 놓여 있었다. "테레지엔슈타트에서의 유대인위원회 구성과 업무 할당은 위원장의 임명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원회의 재량권에 맡겨졌는데, 누가 위원장이될 것인가는 물론 우리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임명은 독재적인 결정의 형태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줄곧 접촉해왔던 지도층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신중히 다루어져야 했지요. 그들은 내내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도급 관료들에게 당신은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는 식으로 할일을 명령해서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된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경우 일 전체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쨌든 모든 일들을 좋아하도록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가 하는 것이다. - P194

따라서 제3제국에서 살면서 나치스처럼 행동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것뿐이다. ‘공적 생활에 유의미한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죄를 측정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준이었다고 오토 키르히하이머가 최근에 그의 정치적 정의』 (Political Justice, 1961)에서 언급했다. 만일 내면적 이주‘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헤르만 야라이스 교수가 뉘른베르크 재판을 받기 전에 쓴 ‘모든 피고측 변호인들에 대한 성명‘에서 지적한 대로, ‘내면적 이주자‘란 단지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대중들 한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의 민족들 중에 버려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반대란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실상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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