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장이의 수선집은 동쪽으로 몇 거리쯤 떨어진 곳, 그들의 임시정부청사가 숨어 있는 거리보다 더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중국인 주인이 한국어로 정호를 맞이하고 그의 구두를 받아 뒤로 가져갔다. 정호는 양말만 신은 채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가상해에 가져온 신발은 그 구두 한 켤레가 유일했다. 심지어 테니스를 칠 때도 그 신발을 신었다.
잠시 후, 구두장이가 밑창을 갈아 손질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닦은 구두를 가져왔다.
"이거 완전 새 신발이 됐군요." 정호가 구두끈을 묶으며 말했다.
"야야" 다음에 또 봐요." 주인이 미소를 지어 보이곤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정호도 마주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봐요. 그 말을 곱씹으며 새로 고친 구두를 신은 발이 이끄는 대로 향한 곳은 부둣가였다. 아마도 이제 다시는 이 구두의 밑창을 갈 필요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셔츠, 바지, 모자, 지금 그가 가진 조촐한 소지품이 그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하지만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듣는 "다음에 또 봐요"라는 그 말이 얼마나더 애틋한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얼마나 더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가? 경성에 있을 때, 그의 분노는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해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잉걸불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 불씨는 모두 물에 씻겨 내려간듯 깨끗이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자유로움뿐이었다.
정호는 부두 옆에 늘어선 자동차들을 지나쳐 선창을 따라 걸으며 숙련된 하늘의 선원처럼 날갯짓하며 떠다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일 이곳을 찾아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하늘의 빛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태평양의 파도 위에 부서지는 태양도 하루하루 조금씩 달랐다. 세상이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은 뼈저리는 아름다움을 그에게 안겨주었고, 다만 그는 그것을 조금만 더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 P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