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옥희는 자신이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소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확히 회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년의 존재를 몇 날 며칠에 걸쳐서야 비로소 알아챘다. 소년은 나무나 울타리처럼 자신을둘러싼 주변 환경의 자연스러운 일부처럼 보였고, 그래서 그는 소년의 존재를 깨닫기도 전에 이미 그 아이가 있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소년은 옥희와 비슷한 또래에 작고 깡마른 체격이었다. 피부는 연한 밤색이었는데, 강한 햇볕에 타서인지 아니면 제대로 씻지못해서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옥희의 시선이 마침내 소년에게 정면으로 쏠렸을 때, 소년은 마치 지금껏 ‘옥희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이 옥희 쪽으로다가오기 시작하자 동그랗게 꼬리가 말린 황구 한 마리가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제야 옥희는 소년의 외양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년이 입은 옷이 너무 낡고 해지다 못해 다시 실타래로 풀려 나가기 직전 같았다. 어떤 걸인들은 본래 옷감보다 천을 덧대어 기운 부분이 더 많은 누더기 차림으로 다니기도 했지만 소년은 옷이 찢기고 틈새가 벌어진 부분을 아랑곳없이 내버려 둔 상태였고, 그래서 뼛속까지 찌르는 돌풍이 부는 순간 너덜거리는 천 조각이 거세게 펄럭이며 맨살을 그대로 내보였다. 동정심과 역겨움으로뒤섞인 감정이 옥희의 마음에 진한 파장을 남겼다. - P154

정호는 공기처럼 가벼운 비단으로 짜인 이불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무엇인가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내가 어른이 되면 이것보다 백배는 더 좋은 걸 너한테 갖다줄 거야." 정호가 말했다. 옥희는 웃으며 물론이라고 답했지만, 정호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정호가 옥희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건 바로 그런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가 평생 벌 수 있을 만한 것보다 더 값진 것을 주겠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당당한 자신감이 옥희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옥희에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절대로 비굴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 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정호가 가진 지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정신은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흘렀으며 제 스스로 고통을 키워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든, 옥희는 그가 장독 같은 마음 안에 깊이 묻어둔 것을 꿋꿋이 지켜내리라 확신했다. 씨처럼 떨어져 내린 곳에서 멀리 탈출하기는 힘들 테지만, 갇힌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호는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 P162

3월의 첫날 아침, 귓가를 스치는 낯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에 정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정호를 따르는 아이들은 다들 그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감지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정호는 자기 아버지가 평안도에서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이었다고, 그래서 자신 또한 들짐승들이-그리고 사냥꾼들도- 험한 산야에서 생존하기 위해 갖추게 된 본능적 직감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거리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내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해졌다. 가끔은 정말로 공기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경찰이나 더 나이 든 남자아이들 무리, 혹은 어른들로 이루어진 건달 무리 등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이들과 충돌의 순간이 닥치기 직전에 미리 피할 수 있었다고 느끼기도 했다. 이런 능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이끄는 집단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냈고, 그들에게서 확고부동한 신뢰를 얻었다.
신세 모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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