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캘리포니아를 찾기는 어렵거니와, 그중 어디까지가 그저 상상이거나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을까 생각하면 불안해진다. 사람의 기억에서 진짜 기억이 아니라 누구다른 사람의 기억, 가족 네트워크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부분을 깨닫는 일은 울적하다. 예컨대 내게는 금주법이 새크라멘토 주변의 홈 경작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생생한 ‘기억‘이 있다. 우리 가족이 알던 홉 경작자의 여동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밍크코트를 사 가지고왔는데, 도로 갖다주라는 얘기를 듣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코트를 꼭 껴안고 울고 있었다. 나는 금주법이 폐지되고 일 년 후에 태어났지만 그 장면은 실제 내가 나오는 기억보다도 더 현실적‘인 느낌이다.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여행길을 기억한다. 뉴욕에서 밤비행기를 혼자 타고 잡지에서 우연히 본 W. S. 머윈의 시를읽고 또 읽었다. 타국에 오래 살았지만 이제 집에 돌아가야한다는 걸 아는 한 남자에 대한 시였다.

•••하지만 꼭
금세라야 한다. 이미 나는 뜨겁게 옹호한다
두둔할 수 없는 우리 흠결들을 확신하면서
기억을 되살려주면 원망한다. 이미 내 마음에서는
우리 언어는 그 어떤 공통어도 약속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묵직하게 짊어지고 있는데, 산과
드넓은 강들은, 지상 그 어디와도 다르고
- P247

그러면 바로 얼마 전에 새크라멘토에 갔던 기억이 아득해질것이다. 미니트맨, 폴라리스, 타이탄, 탄도 미사일 섬광이 번득인다. 커피 테이블은 온통 항공 일정으로 뒤덮여 있고 최첨단이며 외부 세계와 잘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몇 마일 더 멀리로, 은행에 아직도 ‘앨릭스 브라운네 은행‘ 같은 이름이 붙어 있는 소도시들로 당신을 데리고 갈 수 있다. 하나밖에 없는 호텔 식당에 아직도 팔각형 타일 마루가 깔려 있고 먼지 낀 종려나무 화분과 커다란 실링팬이 있고 모든 가게- 종자 사업, 하베스터식당 분점, 호텔, 백화점과 메인 스트리트까지 이름이 하나같이 도시 건설자의 이름을 딴 소도시로 데려가줄 수 있다.
몇 번의 일요일 전에 나는 그 같은, 아니 그보다 작은 소도시에 있었다. 아니, 호텔도 없고 하베스터 식당 분점도 없고은행도 불타 없어진 강가 마을에 있었다. 친척의 금혼식이었는데 기온이 44도에 달했고 주빈들은 리베카 홀의 글라디올러스를 앞에 두고 등이 똑바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기서만난 사촌에게 에어로젯 제너럴을 방문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흥미롭지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 캘리포니아일까? 그게 우리 모두 궁금한 바다. - P249

로스앤젤레스에는 절벽이 부스러져 파도에 휩쓸릴 정도로 비가 내렸고 아침에 옷을 차려입을 마음도 나지 않아서 우리는 뜨거운 날씨를 찾아 멕시코 과이마스로 가기로 했다.
청새치를 찾아가지 않았다. 스킨다이빙을 하러 가는 것도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거고,
그러려면 드라이브밖에 길이 없었다. 녹음이 우거진 어여쁜 장소들이 빛바래고 어딘가 어려운 장소, 사막을 제외한 그무엇도 상상력을 흔들지 못할 때, 그럴 때 노갤러스를 지나쳐 차를 몬다. 사막은, 세상의 모든 사막은 실제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계곡이다. 사막에서 돌아오면 새로 태어난 알케스티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라이의 왕 아드메토스의 아내로, 남편 대신 죽음을 맞지만 헤라클레스가 죽음의 신 타나토스와 싸워 되살려낸다. 옮긴이)가 된 기분이 든다. 15번국도를 타고 노갤러스를 지나면 소노라 사막밖에 아무것도없다. 메스키트와 방울뱀과 동쪽 하늘에 떠 있는 시에라마드레 산맥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간간이 북쪽으로 치달리는 페멕스 트럭과 아주 간혹 페로카릴 델 파시피코의 먼지덮인 풀먼 차량이 지나갈 뿐 인간의 노력일랑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마그달레나는 15번 국도상에 있고 다음에 에르모시요가 나오고, 에르미시는 과이마스에서 불과 85마일(137km) 북부에 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가면 요점을 놓치게 된다. 요점은 열기와 기만적인 시점과 사체의 위압적인 감각에 방향감각을 잃고 쭈그러드는 데 있다. 도로는 은은히 빛난다. 눈은 감기고 싶어한다. - P296

이날 오후 로스앤젤레스의 대기에는 뭔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부자연스러운 정적, 어떤 긴장감. 오늘 밤부터 샌타애나(남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북부에 부는 강한 계절풍.- 옮긴이)가 불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바람이 우는 소리를 내며 카혼과 샌고르고니오 고개를 지나쳐 66번 국도를 따라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산야와 신경줄을 바짝바짝 말려 인화점까지 밀어붙인다.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리는 협곡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밤에는 사이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샌타애나가 불 때가 됐다는 소식은 듣지도 못했고 신문에서 읽은 적도 없지만 나는 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알았다. 우리는 느낌으로 안다. 아기가 보챈다. 가사도우미가 퉁명스러워진다. 나는 전화 회사와의 잦아들던 말다툼에 새삼 불을 붙였다가 괜히 마음만 상해 전화를 끊고 자리에 누워 공기 속에 감도는 기운에 몸을 맡긴다. 샌타애나와 공존한다는 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인간 행동을 보는 심오하게 기계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처음 로스앤젤레스에 와서 외딴 해변에 살던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나쁜 바람이 불면 인디언들이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얘기였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샌타애나가 부는 시기에 태평양은 불길하게 번들거리고, 밤에는 올리브 나무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공작들뿐 아니라 파도조차 없는 섬뜩함 때문에 잠을 설친다. 열기는 초자연적이었다. 하늘에는 누런빛이 감돌았다. 가끔 ‘지진 날씨‘라고 불리는 그런 빛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이웃은 며칠 동안 집 밖 출입을하지 않고 밤에 불도 켜지 않았으며, 그이의 남편은 손도끼를 들고 주변을 배회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침입자 소리를 들었다고 했고, 다음 날은 방울뱀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샌타애나에 대해 예전에 쓴 글이 있다. "그런 밤이면 술이 들어가는 파티는 무조건 싸움으로 끝났다. 온순한 아내들은 고기 써는 칼의 날을 만지며 남편의 목덜미를 찬찬히 살폈다. 그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 - P300

그러니까 나는 뉴욕에서 희한한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거기서는 실제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상상 속에서 나는 언제나 거기 몇 달만 더, 크리스마스부활절까지만, 아니면 5월의 따뜻한 날이 오기 전까지만 머무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남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디든 그네들이 소속된곳으로부터 무한정 연장된 휴가를 떠나온 듯 보였기 때문이다. 미래를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한시적인 망명객들은 뉴올리언스나 멤피스나 리치먼드나, 내 경우에는 캘리포니아로떠나는 비행기 시각을 항상 알고 있었다. 항상 서랍 속에 비행기 일정을 마련해두고 사는 사람은 살짝 다른 달력에 맞춰 생활한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는 다른 계절이다. 다른사람들은 거침없이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스토(버몬트 주 북부의 소도시-옮긴이)에 가거나 외국에 가거나 코네티컷의 어머니 댁에 하루 일정으로 다녀온다. 그러나 우리처럼 어딘가 다른 곳에 집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예약했다 취소하고, 1940년 리스본을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편을 기다리듯 악천후에 발이 묶인 비행기를 기다리다 결국은 남겨진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며 유년기의 오렌지와 기념품과 훈제굴 스터핑을 마련해 서로 꼭 붙어서 머나먼 국가로 파병된 제국의 군인들처럼 함께 지내곤 했다. - P318

 그리고 5월의 어느 날 아침(우리는 1월에 결혼했다) 남편은 내게 전화해 뉴욕에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고 싶다고, 6개월 정도 휴가를 내고 우리 같이 어디론가 가자고 말했다.
그이가 내게 그 말을 한 건 3년 전이었는데, 우리는 그후로 로스앤젤레스에 살았다. 우리가 아는 많은 뉴욕 사람들이 이상한 기벽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할 수 있는 대꾸도 적절한 답도 없어서 우리는 그냥 누구나 하는 틀에 박힌 답을 한다. 우리가 지금 뉴욕의생활비를 "감당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고, 우리한테 "공간"이 더 필요하다고 뭐 그런 얘기를 한다. 사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뉴욕에서는 내가 아주 젊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황금의 리듬이 깨어졌고 이제 나는 젊지 않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뉴욕에 갔을 때는 추운 1월이었고 모두들 아프고 피곤했다. 내가 거기서 알던 사람 여럿이 댈러스로 이사 가거나 알코올 중독 치료를 하러 가거나 뉴햄프셔의 농장을 샀다. 우리는 열흘 머물렀고 오후 비행기를타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그날 밤 공항에서 집으로가는 길에는 태평양 위에 뜬 달이 보였고 사방에서 재스민향기가 풍겨서 우리는 둘 다 뉴욕에 여전히 갖고 있던 아파트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내가 로스앤젤레스를 ‘코스트‘라고 부르던 세월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주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1967- - P3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