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2
새비 아주머니는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불위에 누워서 증조모가 말을 하면 눈짓으로 반응했다.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 P288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 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 P336
나는 오랜만에 할머니 집 소파에 앉아서 집을 둘러봤다. 텔레비전장식장 위에 처음 보는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까이로 가서 액자를 들여다봤다. 액자 속에는 거북이 해변에서 나와 언니,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 나는 싱크대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액자를 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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