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공동 묘지로 가는 길목에서 아르카디오는 지평선에서 싹터 오르는 수요일 햇빛을 보았다. 향수는 안개와 더불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무한한 호기심이 자리 잡았다. 담에 등을 대고 서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야 비로소 젖은 머리에 분홍색 꽃무늬 옷을 입은 레베카가 문을 활짝 열고 있는모습을 보았다. 그는 레베카가 자기를 알아보게 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레베카는 무심코 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너무놀란 나머지 몸이 마비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아르카디오에게 손으로 작별 인사를 뜻하는 표시를 하려는 듯 겨우 몸을 움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카디오도 같은 식으로 레베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순간에 포연에 그을린 총구들이 그를 겨누었고, 그는 멜키아데스가 읊어대던 교황의 칙서같은 글을 한 마디 한 마디 들었으며, 교실 안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처녀 산타 소피아 델라 피에닷의 발자국 소리를 느꼈고, 죽은 레메디오스의 콧구멍에서 느낀 것과 동일한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을 자기 콧구멍에서도 느꼈다. "이런 제기랄! 딸을 낳게 되면 이름을 레메디오스라 지으라고 할 걸 그랬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는 날카로운 발톱에 몸이 찢길 찰나에 처해 있는 것처럼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온갖 공포감에 다시 사로잡혔다. 대위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 아르카디오는 허벅지를 지지는 것 같은 뜨거운 액체가 어디에서 흘러내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겨우 가슴을 내밀고 머리를 들 시간만 있을 뿐이었다. "씨팔 자식들!" 그가 소리쳤다. "자유파 만세!" - P191
화요일 새벽 5시에 호세 아르카디오가 커피를 마시고 나서 개를 풀어 놓았을 때, 레베카는 창문을 닫았고, 넘어지려는 몸을 의지하기 위해 침대 머리판을 잡았다. "저기 데려오고들 있어요." 레베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멋져졌네요. 호세 아르카디오는 창문 밖으로, 젊었을 때 입던 바지를 입은 채 여명 속에서 아른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벌써 담벼락앞에 서서는 겨드랑이 혹 때문에 팔을 내릴 수 없어 손을 허리춤에 대고 있었다. "정말 분하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저런 계집애 같은 여섯 놈에게 죽음을 당하다니, 정말 분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중얼거렸다. 그는 분개하며 그 말을 되풀이했는데, 어찌나 열정적으로 했던지 로케 카르니세로대위는 그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감동을 받았다. 총살형 집행 대원들이 그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그의 분노는 끈적끈적하고 쓰디쓴 물질로 변해 그의 혀를 마비시키고, 그의 눈을 감겨 버렸다. 그때 새벽녘의 희붐한 광휘가 사라졌고, 그는 다시 짧은 바지를 입고 목에 타이를 두르고 있는 아주 어린 자기 모습을 보았고, 어느 아름다운 오후 자기를 천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얼음 구경을 시켜주던 아버지를 보았다. 고함을 들었을 때, 그것이 총살형 집행 대원들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라 생각했다. 달아오른 총탄이 날아와 자기를 맞출 거라는 예상으로 오싹한 호기심이 일어 눈을 떴을 때, 두팔을 번쩍 쳐들고 서 있는 로케 카르니세로 대위와 당장에라도 쏘아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엽총을 겨누고 길을 건너오는 호세 아르카디오만 눈에 들어왔다. - P204
호세 아르카디오가 침실문을 닫자마자 권총 소리가 집 안을진동했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계속해서 똑바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고, 난간으로 올라가, 터키인들의 거리를 통해 뻗어 나가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다른 길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 부엔디아 가문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닫힌 문 밑으로 들어가서는 양탄자를 적시지 않으려고 벽을 타고 응접실을 건너, 계속해서 다른 거실을 건너고, 식당에 있던 식탁을 피하기 위해 넓게 우회해서 베고니아가 있는 복도를 통과해 나아가다,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있던 아마란타의 의자 밑을 들키지 않고 지나, 곡식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 "하느님 맙소사!" 우르술라가 소리쳤다. 우르술라는 어디서부터 피가 흘러나왔는지 알아내려고 핏자국을 되짚어가기 시작해 곡식 창고를 지나 아우렐리아노호세가 셋 더하기 셋은 여섯이고, 여섯 더하기 셋은 아홉이라고 종알거리고 있는, 베고니아가 있는 복도를 지나, 식당과 거실들을 건너, 거리를 통해 곧장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돌고나서 왼쪽으로 돌아, 빵을 구울 때 착용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집 안에서 신는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터키인들의 거리로 가서, 광장으로 나와,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어느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가 침실문을 밀어젖혔을 때 폭발한 화약 냄새로 거의 질식할 것만 같은 상태에서 막 벗어 놓은 각반 위에 엎어져 있는 호세 아르카디오를 발견했고, 마침내 핏줄기의 출처를 보았는데, 그 피는 호세 아르카디오의 오른쪽 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상처 하나 찾을 수 없었고, 무기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시체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듯한 화약 냄새 역시 지울 수 없었다. 처음에 시체를 비누와 수세미로 세 번이나 씻어 냈고, 다음에는 소금과 식초로 문지르고 나서 재와 레몬으로 문질렀으며, 마지막으로 잿물을 풀어 넣은 나무 통에 넣고 여섯 시간 동안 담가 두었다. 어찌나 빡빡 문질러 댔던지 문신의 기묘한 무늬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 P209
그러나 실제로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접촉할 수 있었던 사람은 프루덴시오 아길라르뿐이었다. 프루덴시오 아길라르는 죽음의 세계에서도 진행되는 심각한 노쇠 현상으로 이미 거의 가루가 되어 있었다.86) 프루덴시오 아길라르는 그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 하루에 두 번씩 그를찾아왔다. 그들은 싸움닭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된 승리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죽음의 세계에서 맞는 지루한 일요일이면 심심풀이를 할 만한 무언가를 갖기 위해 멋진 닭들을 키우는 양계장을 만들기로 약•속했다. 그를 닦아 주고, 먹여 주었으며, 또 대령으로 전쟁을•수행 중인, 이름이 아우렐리아노라는 어느 낯선 남자에 대한멋진 소식을 알려 주던 사람은 프루덴시오 아길라르였다. 혼자 있는 동안,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끝없이 연결되어있는 방들에 대한 꿈을 꾸며 즐겼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침대 머리판을 쇠붙이를 다듬어 만든 똑같은 침대와 똑같은 등나무 소파가 놓여 있고, 안쪽 벽에 똑같은 성모 마리아의 작은 초상화가 걸려 있는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꿈을꾸었다. 그는 그 방에서 똑같이 생긴 옆 방으로 건너갔고, 그 방문을 열고 똑같이 생긴 옆 방으로 건너갔으며, 그러고 나서또 똑같이 생긴 옆 방으로 건너가는 식으로 끝없이 돌아다녔다. 그가 사방에 거울을 세워 놓은 회랑 안에서처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드나드는 걸 즐기고 있을 때면, 마침내 프루덴시오 아길라르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면 그는 꿈에서 현실로 깨어나면서, 건너갔던 방들을 반대 방향으로 되건너 와서 현실의 방에 있는 프루덴시오 아길라르를 만났다. 사람들이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를 침실로 옮겨온 지 두 주일이 지난 어느 날 밤 그가 여느 때처럼 중간에 있는 어느 방을 지나고 있을 때 프루덴시오 아길라르가 그의 어깨를 쳤는데, 그는 그곳이 현실의 방이라 믿고 영원히 그곳에 머물렀다. - P220
"왕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왔지." 그들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방으로 가서 그를 온힘을 다해 흔들어 보고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콧구멍 앞에 거울을 갖다 댔지만, 그를 깨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목수가 관을 만들기 위해 그의 몸 치수를 재고 있을 때, 그들은 창밖으로 작은 노란 꽃이 보슬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꽃비는 조용한 폭풍우처럼 밤새도록 내려 지붕들을 덮고 문들을 막아 버렸으며 밖에서 잠을 자던 짐승들을 질식시켜 버렸다. 너무나 많은 꽃이 하늘에서 쏟아졌기 때문에 아침이 되자 거리가 폭신폭신한 요를 깔아 놓은 것처럼 되어버려서 장례 행렬이 지나갈 수 있도록 삽과 갈퀴로 치워야 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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