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이렇게 말한다.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 중간에 있다." <낭환집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란 천지자연 및 우주만물과 인간의 관점과 인식 사이의 중간 지점, 즉 대상과 작자의 사이와 경계가 분리되고 통합되는 어느지점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박지원조차도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 존재하는 중간 지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만 그 중간 지점이란 결코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이치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까닭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는 극단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견해의 다양한 전환과 관점의 무궁한 변환만이 참되고 올바른 식견이 존재하는 중간 지점에 접근할 수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P58
정신이 맑을 때 한 송이 꽃과 한 포기 풀과 한 덩어리 돌과 한 사발물과 한 마리 새와 한 마리 물고기를 조용하게 관찰한다. 즉시 가슴속에 연기가 무성하게 피어오르고 구름이 가득 일어난다. 마치 기분 좋게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는 것 같다가 다시그곳을 깨달아 알려고 하면 도리어 아득해지고 만다.
-돈오점수(頓惡漸修)와 돈오돈수(頓惡頓修)라는 말이 있다.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치고 점진적으로 닦는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달음을 얻고 단박에 닦는다는 뜻이다. 단박에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전자가 깨달음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때문에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후자는 한번의 깨달음만으로도 수행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 같다. 다만 깨달음을 진리의 문제로 옮겨와 생각해 보면, 누군가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인간 세계와 우주 만물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필자는 그에게 사기꾼이라고실컷 욕을 퍼부을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 동시에 그 안다는 것 밖에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모르는 것이존재하게 된다. 즉, 앎이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누구나 앎과 진리와 깨달음을 향해 무한히 나아갈 수 있을 뿐 그 끝은 알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앎과 진리와 깨달음이란 시작과 끝을 알 수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꽃과 풀과 돌, 물과 새와 물고기를 관찰해 만물의 이치를 자득했다가도, 다시 스스로 터득한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오히려 아득해지고 만다는 이덕무의말은 앎과 진리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진솔하게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모두 알고 천하의 이치를 모두 깨달았다고 떠들어 대는 것은 지적 사기꾼들의 허풍에 불과하다. 이덕무의 말과 사기꾼의 허풍 중 어떤것이 더 가치 있겠는가? - P68
천리마의 한 오라기 털이 하얗다고 해서 미리 그 천리마가 백마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온몸에 있는 천만개의 털 중에서 누런 털도 있고 검은 털도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러한 이치로 보건대, 어찌 사람의 한 가지 면만을 보고 그의 모든 것을 판단하겠는가.
- 일반화의 오류란 부분을 갖고 전체인 양 착각하는 잘못을 말한다. 사물의 일부나 단면을 두고서 모든 것이 그렇다고 지레 짐작하기 때문이다. 박지원 역시 <능양시집 서문>이라는 글에서 까마귀의 비유를 통해 일반화의 오류를 통쾌하게 반박한다. "까마귀를 보라. 세상에 그 깃털보다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히 유금(乳金)빛이 번지기도하고 다시 초록빛을 반짝거리기도 하고,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번득이다가 비취색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면내가 그 새를 두고 푸른 까마귀라 해도 좋을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본래부터 그 새에게는 일정한 빛깔이 존재하지 않는데, 먼저 내가 눈으로 빛깔을 정했을 뿐이다. 어찌 눈으로만 결정했겠는가? 보지 않고도 마음속으로 먼저 그 빛깔을 정한다."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의 눈과 마음을 갖추고 세상 만물과 우주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백마를 백마라고 단정하지 말라"는 이덕무의 말은 꽃을 ‘붉을 홍(洪)‘이나 까마귀를 ‘검을 흑(黑)‘ 한 글자로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박제가와 박지원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 P82
‘무위도식(無爲徒食)‘과 ‘무위지치(無爲之治)‘라는 말이 있다. 모두 무위를 말하지만, 전자는 무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행위라고 하는 반면 후자는 무위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진리라고 한다. 같은 말을 갖고 어찌 이리도 다르게 사용한단 말인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말까지 제멋대로 써먹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를 다스리는권력을 쥐고 있는 자신들의 무위는 지극히 높고 바른 것이지만, 자신들을 위해 피땀 흘려 일해야 할 자들의 무위는 결코용납되어서는 안 될 천하의 몹쓸 짓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위지치는 최선의 용어가 된 반면 무위도식은 최악의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무위지치가 최선이라면 무위도식 역시 최선이며, 무위도식이 최악이라면 무위치 역시 최악이다. 어째서누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고, 누구는 피땀 흘려 일하는 것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려야 한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서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익과 명예와 권세와 출세를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위이기도 한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천부적으로 ‘게으를 권리‘가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이나 좋아하지 않는 일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기계처럼 일하다 폐기되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권력의 도구가 되어 뼈 빠지게 일하다가 버려지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거부의 전략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무위도식이다. 흔히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사람들은 무위도식한다고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 일하지 않고도 돈을 벌어 온다면, 세상 누구도 그를 무위도식한다고 비난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열심히 일하는 데도 돈을 벌어 오지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위도식한다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며 조롱한다. 사실은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돈을 벌어 오느냐 벌어 오지 않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뭐 이따위 용어가 있단 말인가? 돈과 권력을위해 일하지 말라. 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하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의 지극한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려면 오히려 무위도식하는 삶을 긍정하고 창조해야 한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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