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외모와 옷차림, 몸놀림 그리고 내가 이룬 것과 남들이 내게 보내는 인정의 눈길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멋지고 영리해져서 남보다 우월한 경탄의 대상이 되리라는 자신감,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상황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엄청난 기대감이 깃들어있었다. 바로 이것이 나를 슬프게 했을까? 당시 나의 가슴을 가득채웠던 생에서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끌어냈던 그 열의와 신념 때문인가? 지금도 나는 가끔 아이들과 십대들의 얼굴에서 그 당시의 나에게서와 똑같은 열의와 신념을 발견한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돌이켜볼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이 슬픈 눈길로 그것을 바라본다. 이 슬픔은 단순한 슬픔일까? 이러한 슬픔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기억 속에서 산산이 부서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일까? 기억 속의 행복은 상황뿐만 아니라 지킬 수없는 약속을 먹고 사는 까닭에? - P44
하지만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전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 - P49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릴 수 있어!" 나는 아침 식사와 장미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서 그녀를끌어안으려 했다. "한나......." "건드리지 마." 그녀는 원피스에 둘렀던 폭이 좁은 가죽 허리띠를 손에 들고있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내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입술이 찢어졌고 피 맛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허리띠를 다시 한 번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내리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띠를 들고 있던 팔을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 크게 벌어진 입, 눈물 때문에 부어오른 눈꺼풀, 뺨과 목의 붉은 반점, 그녀의 입에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의 단조로운 신음 소리와 비슷한, 목이 잠긴 듯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흐르는 눈물 사이로 나를 쳐다보았다. - P62
비행기의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 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엔진이 고장난 상태에서의 비행은 엔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와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비행은 조금 더 조용하다. 아주 조금 더 조용하다. 엔진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것이 몸체와 날개에 와서 부서지는 바람 소리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창문 밖을 내다보면 땅이나 바다가 위협적으로 가까이 와있다. 아니면 기내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남녀 승무원들은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상태이리라. 승객들은 어쩌면 약간 더 조용해진 비행을 특히 쾌적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은 우리 사랑의 활공 비행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나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 P76
그 후 나는 그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한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거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내가 털어놓았어야 하는 것들도 일체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부인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부인을 하는 건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건지, 심사숙고하는 건지, 난처함과 불쾌함을 피하려는 건지 구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 본인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인은 배반의 다른 몇 가지 떠들썩한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토대를 앗아가버린다. - P82
그러던 어느 순간 그런 기분이 싹 사라졌다. 어느 순간 나는 숙제를 하고 배구를 하고 시시덕거리며 장난질하는 수영장의여느 오후와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그때 내가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2.3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짧은 반바지에 허리부분을 끈으로 묶은 앞이 터진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돌아보았다. 거리가 멀었기때문에 나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녀가 왜 수영장을 찾아왔는지, 자신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그녀 쪽에서 나와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아니면 내가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우리는 왜 여태껏 한 번도 우연히 만난 적이 없었던 건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등의 의문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일어났다. 일어서느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알아볼 수 없는 표정의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짧은 반바지와 끈을 동여맨 블라우스 차림의 한나. 그것 역시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들 중 하나이다. 다음 날 그녀는 떠났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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