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 병석에 누워 있는 시간은 정말 마법의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바깥세상, 즉 마당이나 정원 또는길거리에서 보내는 자유 시간의 세계는 아주 희미한 소리가 되어 병실로 들어올 뿐이다. 병실 안에는 환자가 읽고 있는 이야기와 형상들의 세계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고열은 주변 세계에 대한 감지력을 떨어뜨리고 상상력을 날카롭게 해 병실을 하나의 새로운, 친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괴물들은 커튼과 벽지의 문양 속에서 흉측한 얼굴을 내보이고,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서가와 옷장들은 산이나 건물 또는 배가 된다. 그것들은 우뚝 솟아올라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우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기나긴 밤 시간 내내 환자와 함께 있어주는 것은 교회 시계탑의 종소리와 가끔씩 지나가는자동차들의 부르릉 소리, 사방의 벽과 지붕을 더듬으며 반사되는 전조등 불빛뿐이다. 이때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불면증의 시간은 아니다. 즉 결핍의 시간이 아니라 충만의 시간이다. 동경, 회상, 불안, 욕망 등이 미로를 만들어놓는다.
환자는 그 미로에서 끊임없이 길을 잃고 또다시 찾았다가 또다시 잃곤 한다. 이때는 모든 것이 가능한 시간이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 할 것 없이.
그런데 환자의 병이 나으면 이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하지만 병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 상태라면, 병실은 외부 세계에대해 방수 처리되고 이제 병이 거의 나아 전혀 열이 나지 않는환자라 하더라도 미로 속에서 헤맨다. - P20

나는 가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에겐 가축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산책 나갈 때 데리고 가는 개, 데리고 노는 고양이, 사람의 무릎 위에서 몸을 동글게 말고 있다가 쓰다듬어주면 기분 좋게 가르랑거리는 고양이. 이 녀석들은 우리에게 사랑스런 존재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의 먹이를 사러 가고 변기를 치우고 가축병원에 가는 것은 사실 너무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의 인생 자체였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나는 가끔 늘 불평만 늘어놓는 형과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여동생도 차라리 다른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엔 그들 모두가 갑자기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의 어린 여동생. 생각건대 4남매 중에 막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도 뻔뻔스럽지 않고서는 자기주장을 할 수 없었으리라. 나의 형. 우리는 한방을 썼다. 이것은 분명히 나보다는 그에게 참기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게다가 내가 병이 난 후로는 방을 완전히 내게 넘겨주고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의 아버지. 그에게 우리 자식들이 어떻게 인생이 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자라나 곧 어른이 될것이고 그러면 집에서 나갈 테니 말이다. - P34

"이름이 뭐예요?"
나는 7일인가 8일 째 되는 날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내 몸 위에서 잠들어 있다가 막 눈을 떴다. 나는 그때까지당신이라든가 너라는 호칭을 피했었다.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이름이 뭐냐고요!"
"그건 왜 알려고 그러니?"
그녀는 나를 의심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당신하고 나는•••••• 나는 당신 성만 알고 이름은 모르잖아요. 난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그게 뭐 잘못되기라도••••••."
그녀는 웃었다.
"아무것도 아냐, 꼬마야. 아무것도 잘못된 거 없어. 내 이름은 한나야."
그녀는 계속해서 웃었다. 그녀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바람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당신 모습이 정말 우스꽝스러워 보여요."
"반쯤 잠들어 있었거든. 네 이름은 뭐니?"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걸로 생각했다. 학교에서쓰는 물건들을 책가방 대신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물건들을 부엌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맨 위쪽에, 즉 공책뿐만 아니라 책들 위에 적혀있는 내 이름이 보였다. 나는 늘 배운 대로 책들을 튼튼한 종이로 싸고 거기에 책 제목과 내 이름을 적은 표찰을 붙여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이름은 미하엘 베르크예요."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그녀는 내 이름을 음미했다. "내꼬마의 이름은 미하엘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고, 나이는, 열일곱 살?"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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