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부족들이 원래 살던 지역인 ‘고향homeland‘은 표면적으로는흑인들이 자유롭게 거주하는 ‘자치구‘였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남아공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흑인이지만, 이 자치구에 할당된 면적은 국토의 13퍼센트에 불과했다. 수도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두막에서 살았다.
남아공에서 백인들이 사는 땅은 싱싱하고 물이 풍부한 녹지였지만, 흑인들의 땅은 과밀화됐으며 토양은 메마르고 황폐했다. 도시에서 보내오는 변변찮은 돈과 농사일을 통해 이곳의 가족들은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다. 엄마의 고모는 엄마를 불쌍히 여겨서 거둔 게 아니었다. 엄마는 일하러 왔을 뿐이었다. "나는 소나 다를 바가 없었지." 엄마는 후에 그렇게 말했다. - P101

엄마는 내가 갈 수 있는 곳과 할 수 있는 일에 한계란 없다는 듯나를 키웠다. 되돌아보면 엄마는 나를 백인 아이처럼 키운 것 같다. 백인 문화에 따라 키웠다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게 했고, 내가 나 자신을 변호해야 하고, 내 의사와 결정이 중요하다는생각을 심어 줬다는 뜻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꿈을 좇으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꿈꿀 수 있다. 그리고 상상력은 자신의 출신에 따라 제한을 받게 된다. 소웨토에서 자랄 때 우리의 꿈은 집에 방 한 칸을 더 늘리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진입로도. 또 언젠가는 진입로 끝에 철제 대문을 세울 수 있길 바랐다.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성의 최상층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선다. 엄마는 그 가능성을 내게 보여 주었다. 내가 엄마의 삶에서 항상 놀라워했던 점은, 누구도 그녀에게 그 가능성을 보여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엄마를 선택하지 않았다. 엄마 홀로 해냈다. 엄마는 순전히 의지의 힘만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 P114

이웃들과 친척들은 성가실 정도로 엄마에게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 빈민가를 떠날 수도 없는 아이에게 세상을 보여 주려고 해?"
그럼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말이죠, 설령 이 아이가 빈민가를 떠나지 못한다고 해도 빈민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건 알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 P116

 하지만 나는 다행히 엄마에게서 또 하나의 능력을 물려받았다. 인생의 고통을 잊는 능력 말이다. 과거의 기억들은 트라우마로 이어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어떤 정신적 외상도 안고 있지않다. 나는 뭔가 고통스러운 기억이 새로운 도전을 막아서도록 놔두지않았다. 엄마에게 맞았던 기억, 혹은 인생이 당신에게 남긴 체벌을 너무 심각하게 담아 두면 경계를 넘어서고 규칙을 깨지 못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잠시 운 다음, 다음 날 개운하게 일어나서 계속 전진하는 편이 낫다. 몸 곳곳에 든 멍 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더라도 괜찮다. 얼마 지나고 나면 멍은 사라진다. 그리고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이제 다시 사고를 칠 때가 왔기 때문인 거다. - P140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아빠는 대형 앨범을 가져와서 식탁 위에펼쳐 보였다. "난 늘 너를 지켜봐 왔지." 거기엔 내가 해 온 모든 것들이스크랩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언급된 신문 기사들, 클럽 출연진을 다룬 잡지 기사들, 커리어의 시작부터 바로 이번 주까지 내 모든 행적이 담겨 있었다. 아빠는 나와 함께 앨범을 넘기는 동안 헤드라인을 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트레버 노아가 금주 토요일에 블루스룸에 출연‘ ‘새 텔레비전 쇼의 진행자로 트레버 노아 낙점‘
온갖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걸 느꼈다.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지난 10년간의 잃어버렸던 시간이 순식간에 메워지는 듯했다.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게 마치 어제 일 같았다.
오랫동안 나는 너무 많은 의문들 속에서 살아왔다. 아빠가 내 생각을 할까? 내가 뭘 하는지 아빠는 알고 있을까? 나를 자랑스러워할까? 하지만 그는 내내 나와 함께 있었다. 그는 늘 나를 자랑스러워해왔다. 비록 상황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아빠는 한순간도 내 아빠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날 아빠 집에서 나온 나는 한 뼘 자라 있었다. 그를 만나니 아빠가 나를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더 강해졌다. 아빠는 자신의 인생에 나를 들이기로 선택했던 거였다. 아빠는 내 편지에 답장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의 바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는다는 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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