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핵폭탄들이 모든 대도시를 가루로 만들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첫 폭탄이 떨어지자마자 반대 진영의 핵폭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혹자는 컴퓨터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즉각적인 반격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핵미사일 수백 개가 음산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갈랐다. 아마도 그 미사일들 가운데 하나가 진로를 이탈해서, 인간 세상을 산산조각 내는 대신에 태양계의 중심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또 금성이나 수성에 부딪히지도 않고 태양에 도달했으리라. 그 충돌로 어마어마한 빛이 발생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카미유는 잠을 자느라고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재난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불이 꺼졌다. 모든 불이 꺼졌다. 그리하여 지구는 어둠과 추위 속에 떨어졌다. 그날도 그 다음날도 새벽빛은 밝아 오지 않았다. 그날부터 세계는 절대적인 암혹 속에 잠겨 버렸다.
카미유는 그날 이후로 매일 그랬듯이,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친 다음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차갑고 매끈매끈한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이건 아쉬움의 표현이 아니라, 살아갈 힘을 잃지 앓기 위한 의식일 뿐이다. - P230
몇 분 후 카미유는 웬 사람과 마주 앉게 되었다. 에테르 냄새를풍기는 그 사람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때리세요?」나는 나 자신을 방어했을 뿐이야.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 누군데 감히 나한테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지?」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니까. 할아버지는 쓰레기차에 부딪히실 뻔한 적도 있고 오토바이와 자동차에 치이실 뻔한 적도있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혼자 길을 건너는 게 위험할 것 같아서 어떤 젊은이가 도와주려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하얀 지팡이로 그 젊은이를 마구 때렸대요.」「지팡이라니?」「양로원에서 준 지팡이 말이에요.」「그건 지팡이가 아니라, 브뤼슬리앙드야.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지. 내가 잠을 자다가 받은 거야.」「이제 명백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셔야 해요.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실 수는 없어요.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세상이 어둠에 잠기지도 않았고요.」상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태양이 꺼지고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빛을 감지할 수 없게 된 거예요. 제가 안과 의사로서 말씀드리는데, 할아버지의 시신경은 하룻밤 사이에 급격히 퇴화했어요. 그래서•••••• 카미유는 그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셨어요.」 - P234
우리 어린 신들은 누구나 조금은 우쭐대는 경향이 있다. 그건신의 속성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시조 신이 이르신 것처럼, <서로 험담은 하지 말아야 한다. 험담은 종교 전쟁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스갯소리를 하고 흰소리를 칠지언정 다른 신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비슈누가 내 등을 치면서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내가 들어본 그 어떤 험담보다 고약한 말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참 재밌어. 하지만 너 혹시 이런 생각 해본적 없니? 어딘가에서 우리보다 높은 차원의 신들이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마치 우리가 인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듯이 말이야」 까닭은 확실치 않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렸다. 내가 어떤 우월한 존재들의 장난감이라니!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가 자유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어떤 존재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라니! 왝, 나는 구토를 하고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 이튿날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비슈누에게 말했다. 「그건 불가능해, 신들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신의 웃음이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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