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라 주민은 재산세를 내지 않는다. 중산층 유권자 중 일부는이 사실을 싫어한다. 공공 서비스가 늘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세금도 부과될 것이다. 상수도와 안정적 전력은 수도세와 전기세 고지서와 함께 올 것이다. 「파벨라가 위험하지 않게 되면, 이곳 주민도 도시의 다른 부유한 곳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업적 착취를겪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저항도 못합니다.파우치니는 말했다.
파벨라 거주자 중에는 한집에서 삼대가 살아온 이들도 있다. 그런집이 그들의 재산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듯하다. 반면 정착한 지 일 년도 안 된 이들도 있는데, 그런 이들에게도 점거자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 답은 확실하지 않다. 만약 파벨라 주민들에게 거주지에 대한 소유권을 준다면, 주민들은 그곳에서 바라보는 멋진 경치를 원하는 부자들에게 자기 땅을 팔아넘기지 않을까? 많은 파벨라에서 근사한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어떤 파벨라에서는 리우 전체를 굽어볼 수 있고, 저 멀리 구세주 그리스도상 너머 바다까지 내다볼 수 있다. 다른 도시에서 그런장관을 즐기려면 파산할 만큼 돈을 써야 할 것이다. 파벨라 거주자중 일부는 월세를 내고 사는데, UPP가 상주하는 동네에서는 벌써 월세가 올랐다. 중산층 카리오카들의 중론은 파벨라를 보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모두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파벨라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늘 <더 나은 동네로 옮기고 싶은지 물었는데, 이때 옮기고 싶다고대답한 사람은 비교적 최근에 브라질의 다른 지방에서 이곳으로이사 온 사람들뿐이었다.  - P583

 그는 도시의 중산층이 파벨라에 매력을 느끼는 현상이 오히려 파벨라 주민을 덫에 가둔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말했다. 「파벨라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펑크 음악이나 삼바로만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건 공평하지 못해요. 파벨라 주민도 원한다면 베토벤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선택지를 가져야 합니다.」그는 정부가 파벨라에서 카포에이라 강좌는 지원하지만 마케팅이나 비즈니스 과정은 지원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평정 사업이 파벨라의 일상을 덜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의도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렇지만 무엇이 혼란인지 누가 정하죠?」 그는 물었다. 파벨라에서 삶이 이럭저럭 굴러가는 것은 유기적으로 꿰맞춰져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나름의 체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혼란을 해결한답시고 지금 기능하는 것을 파괴해 버리면, 몹시 위험한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의 꿈은 자신이 파벨라 아이들에게 그동안 몰랐던 것, 바깥세상에서 온 것을 가르치고 나면 언젠가 바깥세상이 파벨라로 들어와서 파벨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다. 「아이들도 세상에 무언가를 돌려주는 날이 오기 전에는, UPP가 제공한 것이 아이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 P587

한 무덤에는 <히틀러의 손에 죽은 솔로몬들을 기리는 비문이새겨져 있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내 친척들이 쓰는 이름과 같은것이 많았다. 묘지 한가운데에는 이 지역에서 끌려간 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유대인 5,000명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었다. 로즈 고모할머니의 말이 귓전에 울렸다. <우리가 그곳을 빠져나온 것은 행운이었어. 이 순간 이전까지만 해도 내게는 고모할머니의 말이 완전히 옳지만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내 가족이 유래한 동네가 최소한 그림처럼 아름답기를 바랐고, 내가 그 장소와 놀라운 일체감을 느끼게 되기를 바랐다. 내가 여전히 제한된 삶을 사는 듯한이곳, 부쿠레슈티에서 접했던 지적 자극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곳에 갇혀 사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이토록 낙심하게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전쟁 지역도 취재해보았고 빈곤한 사회도 취재해 보았지만, 그래도 그곳들은 늘 본질적으로는 나와는 다른 곳이라고 느꼈다. 반면 이곳은 충격적일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들처럼 살다 죽을수도 있었다. - P616

마을을 빠져나올 때, 그 동네 농부들을 보았다. 그러자 저들의조상 중 일부가 내 조상을 포함한 이웃 사람들의 집을 불태우지만않았어도 내 조상들이 이곳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이 두 세대 동안 겪은 일이 떠올랐고, 겪지 않은 일이 떠올랐고, 그러자 문득 폭력적이었던 역사에 화가 치밀기는커녕 그 덕분에 내가 특권을 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압은 때로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이득이 된다. 타인의 삶을 짓밟는 사람들은 파괴에 에너지를 소진하지만, 그 때문에 삶이 망가진 사람들은 해결책을 찾는 데 힘써야 하고 그 해결책 중 일부가 삶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증오가 우리 가족을 미국으로 내몰았고, 덕분에 우리는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자유를 누렸다. - P617

야당 지도자이자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정의의 이름으로 용기를 상징하는 아웅산 수치는 20년의 가택연금에서 2010년 풀려났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끄는 민주국민연맹NLD은 마침내 상원에 진출했다. 미얀마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발전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막상 목격한 것은 극도로 신중한 중립적 태도였다. 누구도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앞으로도 죽 이렇게 고정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미얀마 사람들은 팔락거리던 희망의 불꽃이 결국 꺼져 버리는 일을 너무 자주 목격했기 때문에, 인구 다수가 믿는 불교의 철학이 현재 벌어지는 변화의 활기를 얼마간 누그러뜨렸다. 미얀마 사람들은 1948년 독립을 앞두었을 때는 아마 낙천적이었을 것이다. 학생 시위가 새로운 정의를 약속했던 1988년에도 낙천적이었다. 2007년 사프론 혁명 때도 조금은 낙천적이었으나, 승려 수천 명이 정부에 반대하여 떨쳐나섰던 혁명은 결국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2014년, 미얀마 사람들은 들뜬 기대를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들의 레퍼토리에서 아예 지웠고, 이제는 그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볼 뿐이다. - P622

미얀마는 크게 두 가지 공포증을 갖고 있다. 중국에 침략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1억 6000만 무슬림 인구와 자국 내 무슬림 인구에게 압도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많은 미얀마 불교도들은 꼭 유럽과 미국의 이민 반대자들처럼 무슬림들이 사회에 동화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미얀마인의 불평은 무슬림이 자기들끼리만 부를 향유한다는 것(그러나 실은 대부분의 무슬림이 무일푼이다), 사채업을 한다는 것, 그리고 제일 나쁜점으로 무슬림은 아내를 여럿 두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수 집단이되어 불교도를 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미얀마인은 피부색이 짙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종차별도 작용한다. 미얀마에서는 사회의 거의 모든 차원에서 인종차별이 용인된다. 일례로 2009년 홍콩의 미얀마 총영사는 영사관 직원 전체에게 보내는 글에서 로힝야족은 피부가 검기 때문에 <희고 부드러운> 버마인과는 달리 <괴물처럼 추악하다>고 말했다. 벵골 지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무슬림의 후손들은 개중 많은 가정이 백 년 넘게 미얀마에서 살아왔다 - 대개 라카인주(州)에서 산다. 그들은 스스로를 로힝야족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을 외국인으로 취급하는 미얀마 국가주의자들은 벵골족이라고 부른다. - P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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