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아서 회복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다양한 우울증 치료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원래는 말하자면 의료 보수주의자랄까, 우울증에 듣는 치료법은 약, 전기 경련 요법, 일부 대화 치료 등 두어 가지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차츰 마음이 바뀌었다. 상상해 보자. 당신에게 뇌종양이 있는데 하루에 삼십분씩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가글을 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야 기분은 나아졌겠지만 모르면 몰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뇌종양이 있을 테고 다른 치료법을 쓰지 않는다면 당신은 여전히 죽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우울증이 있는데 하루에 삼십 분씩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가글을 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치료된 것이다. 우울증은 기분의 질병이고, 만약 당신이 기분이좋다면 더 이상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372
그리고 나는 기분이 나아졌다. 정말 나아졌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비록 내가 그 의식의 밑바탕에 깔린 애니미즘을 믿지는않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응원해 준 것은 신나는 경험이었다. 그로부터 오 년 뒤, 다음 책을 쓰려고 조사차 르완다에 갔을 때신기한 일이 있었다. 그곳의 누군가와 대화하던 중 내가 세네갈에서 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상대가 말했다. 「아, 여기에도 비슷한 의식이 있습니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이고 여기는 동아프리카라서 꽤 다르긴 하지만, 여기 의식에도 비슷한 점들이 있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멎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학살 직후 이곳에 온 서양의 정신치료사들과 우리 사이에 갈등이 많았죠. 어쩔 수 없이 그중 일부에게는 떠나 달라고 말해야 했습니다.」「뭐가 문제였습니까? 나는 물었다. 「그들의 치료법에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밖으로 나가 해를 쬐는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신이 기분이나아진 건 밖에서였잖아요. 그들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피를 다시 돌게 만드는 음악도 북도 쓰지 않았는데, 기분이 저조할 때는 피를 다시 돌게 만들어야 합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하루 일을 접고모여서 당신의 기분을 띄워 주고 기쁨을 되찾아 주는 일이 얼마나중요한지도 이해하지 못했죠. 우울증은 밖에서 몸으로 들어온 것이니 도로 내쫓을 수 있다는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았고요.」 그는 의미심장하게 잠시 뜸을 들였다. 「그들은 그 대신 사람들을 한 명씩작고 우중충한 방으로 데려가서 한 시간쯤 앉혀 두고 그들에게 벌어진 나쁜 일을 말하게 했어요.」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나라를 떠나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 P379
그러나 세네갈 사람들이 정신 질환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들을 공동체에 받아들여 보듬는 것이다. 보통 가족이 환자를 돌보고, 공동체도 가령 스스로를챙기지 못하는 환자에게 식사를 챙겨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돕는다. 예전에는 정식 정신과 의사들이 전통 치유법과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요즘은둘을 나누는 선이 지워지고 있고 협동 작업도 흔해졌다. 다카르의 정신병원들은 집단치료를 할 때 곧잘 은데웁의 요소를 도입하여, 전통적인 방식처럼 동그랗게 원을 이루어 실시한다. 사례가 유달리 까다로울 때는 은데옵치유사를 불러와서 도움을 받기도 한다. - P380
놀랍게도 탈레반은 초기에 오히려 예술을 지원했고 문화 보존프로그램에도 관여했다. 체제 말기에 와서 테러 집단 알카에다와 외국 요원들이 전횡을 휘두르게 되고서야 탈레반은 반예술 정책을수립했고, 그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국보도 2천 점쯤 포함하여 마구 파괴하기 시작했다. 탈레반의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체성을 깡그리 지움으로써 새 체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정서가 힘을 못 쓰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과거 소련이나 마오주의 중국이 예술에 개입했던 것은 애국적 선전에 동원할수 없는 역사를 선별적으로 제거하려는 요량이었지만, 탈레반은 그냥 깡그리 말살하려고 했다. 아프간적인 것이라는 개념 자체를 근절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지식인과 예술가에게만 개입해서는 부족했고, 보통 사람들과 그들이 누리는 일상적 즐거움에도 개입해야 했다. 라힘은 말했다. 탈레반은 우리 문화적 정체성의 약 80퍼센트를 파괴했습니다. 더구나 소련이 이미 피해를 입힌 뒤였는데, 소련은 아프간의 1천 년 역사를 19세기 마르크스주의로 축소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탈레반은 모든 것을 다 파괴하고 싶어했죠 - P385
탈레반 치하에서나 미국이 이끈 침공의 첫 단계에서는 카불에서파티를 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갔을때도 아직 그곳은 엄숙하고 슬픈 분위기였다. 그러나 가까운 역사에서 끔찍한 상처만을 입은 그 도시에는 이제 좀 즐기고 싶어 하는사람들이 많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환대는 전설적이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전쟁 중 조국에 대해서 괴롭게 느꼈던 점 중하나는 외국인들에게 환대를 베풀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 가면서 그곳에서 고난을 목격하리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여러 참혹한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또한 그곳 사람들의 따스함과 자긍심도 느꼈는데, 그것은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으로 복귀한 작은 기쁨들에서도 느껴졌다. 사람들은 그토록 오래 금지당했던 그 기쁨들을 선선히 개방적으로, 너그럽게 우리와 나누었다. 세상에는 깊이 애통해 본 사람들만이 아는 기쁨이 있다. 행복은 독자적인 성질이기도 하지만 대비가 빚는 효과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음식과 음악을좋아하는 것을 아주 기뻐했다. 우리는 그냥 필라우와 부러니를 함께 먹기만 해도, 사린다과 라밥과 깃작에 맞춰 함께 춤추기만 해도 외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우리의 저녁은 수피교도들의 의식에 뒤지지 않는 우리 나름의 황홀경이었다. 우리의ㅍ음악은 마침내 충족된 열망으로 한 음 한 음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런 음악을 나는 달리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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