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삶은 책기둥에서 시작되었다.


결혼 후 목동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옆집에는 대기업에 다니는 아저씨와 아이들 둘을 키우며 집에서 미술 교실을 운영하는 아줌마가 살았다. 하루는 아줌마가 사정이 생겼다며 자기 대신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마 했다. 행여나 놓칠세라 다섯살 아이의 손을 꼭 잡고길 건너로 갔다. 그런데 어린이집 입구에서 선생님을 보자마자, 아이는 안 들어가겠다고 엉덩이를 뒤로 빼더니 흐앙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어 교사에게작고 보드라운 아이 손을 넘겨주었고, 곧 문이 닫혔다. 무슨 사이렌처럼 울리는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돌아서자니 마음이 찌르르해지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눈물도 전염이 되는걸까. 예기치 못한 감정에 괜스레 머쓱했다. 인간은 아무리나이가 어려도 저마다 감당해야 할 슬픔의 몫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 P5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해방이다. 인터넷에서 인종차별 철폐 집회 사진을 봤는데 흑인이 든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평화는 백인의 단어다. 해방이 우리의 언어다 모아놓고 나니 이 책에도 해방이란 말이 꽤 여러번 등장한다. 읽는 사람이 되고부터, 즉 고정된 생각과 편견이 하나씩 깨질 때마다 해방감을 느꼈기에쓴 것 같다. 나도 해방을 우리의 언어로 삼는다. 비록 앎이주는 상처가 있고 혼란과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무지와 무감각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무신경함이누군가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으며, 적어도 약자의 입막음이 평화가 아님은 알게 되었다. 더디 걸리더라도 배움을 통한 해방은 내적 평안에 기여하고 낯빛과 표정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해방은 평화를 물고오는 것이다. - P23

‘욕구란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캐럴라인 냅 Caroline Knapp은 『욕구들』에서 정의해요. 그런데 이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여자는 하지 말아야 해요.
"먹지마, 커지지 마, 멀리 가지 마, 많이 원하지마."
꽤나 익숙한 명령이죠. 사랑눈이 다이어트 실패기를 두페이지나 되는 글로 썼던 것처럼 먹지 말아야 하고요. 사랑눈이 전문직이지만 직업적 야망을 갖지 않게 된 것처럼 남자보다 잘나가도 안 되고요. 사랑눈이 수업 하나 들으면서배우자, 아이,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에까지 시달리는 것처럼 나의 필요는 가족의 필요를 위해 포기해야하고....
이렇게 ‘하지마‘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최초의 욕구가 발동했을 때 ‘잘하는 법‘을 고민하기도 전에 내가 이걸 해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의심과 싸우게 됩니다. 캐럴라인 냅이 떠올리는 자기 어머니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죠. "애초에 자신에게 욕망하고 원할 권리가 있는지조차 확신하지못하고, 자신의 필요들을 부끄럽게 여기며, 심지어 그 필요들을 거의 인정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 여자를 상상하게 된다." 22-23) - P53

Y에게 연애 개시 문자를 받고 제가 덕담을 건넸죠. 사람깊게 사귀는 게 큰 공부니까 부디 잘해보라고요. 그 말은 이사랑의 정의에서 왔어요. ‘사람 깊게 사귀는 일‘이란 "유아론적인 ‘나‘의 삶, 즉 ‘하나‘의 삶을 포기" (164면)하고 ""둘의 무대‘가 가져오는 고통과 충돌, 불확실성 등을 감수하고, 그것과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것"(159면)을 뜻하고요, ‘큰 공부‘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구축‘이겠지요.
Y,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 하잖아요. 대개는 그렇죠. 그런데 한 존재가 자기를 격하게 바꿔내는 계기가 두가지 있는것 같아요. 하나는 사랑으로 아플 때,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할때. 그래서 사랑을 쉽게 하고 돈을 쉽게 벌고 그러면 좋겠지만타자 체험의 기회가, 즉 다른 내가 되어볼 계기가 없다는측면에서는 그리 좋은 삶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삶에서 사랑을 중히 여기고 사랑을 공부하는 사랑을 해야한다는 믿음을 갖는 이유이지요.
근데 저자인 알랭 바디우의 연애는 어땠을까요. 실전에서는 문자메시지의 조사 하나, 구두점 하나에 웃고 우는 마당에 이런 철학 개념과 사유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한대요. 그래도 저는 작은 쓸모를 믿는 편입니다. 암기해둔 이사랑에 관한 비장한 말들과 옳은 말들이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혼란의 순간에 불쑥 솟아나 생각과 판단의중심추가 되어줄 거예요.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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